기사 메일전송
서양화가 김수익 “그리움은 영원한 창작의 샘이다” - 서양화가 김수익의 스토리텔링, ‘고향 & 어머니’
  • 기사등록 2011-04-09 07:18:47
  • 기사수정 2011-04-09 07:18:50
기사수정

21세기 들어 한국화단에는 화가와 관객이 ‘소통’하는 방법으로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구현하는 일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화가 자신의 사연이 담긴 가슴 밑바닥 잔잔한 그리움과 애달픔을 캔버스에 옮겨 관객으로 하여금 시대의 아픔을 이해하고 통감하게 한다.

과거 일직선상으로 보여주던 전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물이 살아 있는 ‘그리움’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정감(情感)이 있다는 것은 바로 이것. 관객이 작품을 볼 때 작가와 한 마음으로 느끼고 체감함으로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이다. 어느덧 성장해 버린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 오래 잊고 있었던 ‘향수’를 떠올리게 함으로써 절반은 따뜻하고, 또 절반은 그립게 만드는 아득함이 뭉글뭉글 무궁화 꽃잎처럼 가슴에 피어난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화가 김수익의 그림은 매우 반갑고도 정겹다. 근세기 초 이중섭,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보듯 황토색의 우직한 힘을 자랑하는 ‘누런 황소’, 그리고 풍만하게 둥그런 ‘달항아리’ 모양의 나무 그늘 등이 잃어버린 옛 정취를 더듬게 만든다. 그 시절 자녀를 위해 희생적이고 헌신적이던 ‘어머니’ 모습과 젊고 건강하던 흰옷 차림의 ‘백의민족 아버지’, 그리고 마냥 순수하게 꿈꾸는 어린 동심이 김수익 화백의 그림 속에 모두 담겨 있다.

 

탄탄한 해부학으로 인물의 숨겨진 이면을 확장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도’는 미술일까 과학일까. 인간 두개골을 매우 가는 선으로 세밀하게 포착할 뿐만 아니라 정교하게 뼈 조각들을 정확히 맞춰내고 있다. 이어 흉부와 복부를 관통하는 내장기관과 소화기관, 신경기관은 엑스레이를 투시한 듯 명확하다. 이토록 세밀하면서도 힘 있는 필치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그림이기에 더욱 눈길을 사로잡는다. 구체적이면서 사실적인 이와 같은 그림은 미술과 과학, 또는 미술과 의학을 서로 다른 것으로 양분하기 어렵게 한다.

이러한 서양 회화사의 연구를 토대로 한국의 김수익 서양화가도 자신의 화폭 속에 그 이면의 세계를 확장한다. 오랜 창작활동 속에 해부학을 그 밑바탕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기본 구조를 이루는 세계가 탄탄하도록 영역을 확장하는 장치를 하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물론 라파엘과 미켈란젤로를 연구한 김수익 화백은 ‘진드기’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집요하리만치 ‘미술해부학’에 매달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어딘지 모르게 시원하고 통쾌하며 굵직굵직하다. 황소의 둥근 눈망울과 등허리의 굵은 선뿐 아니라 인간의 외형을 밝히는 윤곽선에 이르기까지 대범하고 힘차다. 그래서 미술평론가 신항섭 선생은 “김수익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이해가 쉽다. 그의 조형언어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다. 이는 선묘방식의 형상언어가 주는 명료성 때문이다”고 들려준다.

그의 그림 속에는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나 감정 외에 범인류적인 해부도가 숨어 있어 쉽고 솔직하게 나타난다. 분석적인 시각이 필요 없는 순수한 한국적 이미지를 그려내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동양인이 갖는 강인함과 순수함, 그리고 토속성과 신비감을 아울러 여러 가지 색깔로 표현해낸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12가지 색을 혼합해 그린다. “보통 사람들은 동양인인 자신의 색채를 모른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모더니스트하면서 컬러스트하다’고 평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신비로운 색깔이라는 것이다. 보통 창작에 전념하면 12가지 이상의 색상을 섞어서 사용한다. 흰색이 흰색은 아니고 검은색이 검은색은 아니다. 그래서 다른 작가에 비해 그림을 책자로 인쇄하면 그 본래의 색상이 안 나온다. 보통 4도 인쇄하는 출판사에서 매 그림마다 1도 이상 더 깊이 들어간 그림에 대해 난해해 한다. 여러 가지 색상을 섞어서 사용했기에 컴퓨터도 잘 파악하지 못한다.”

 

김수익 화백의 스토리텔링, ‘그리움’

1944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수익 화백은 12남매 중 막내다. 그가 6살 될 무렵 6·25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가 북으로 끌려가고 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다. 큰 형과 30년 터울인 그는 어머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는 가운데 형과 누나들 틈 속에서 자랐다. 때문에 그에게 어머니는 늘 그립고 절실한 존재였다. “어머니가 마흔 다섯에 늦둥이를 낳았으니 모유를 충분히 먹이셨겠어요?” 반문하는 그.

이후 혼자서 그림을 그리며 많은 시간을 보낸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 미대 서양학과에 진학한다. 당시 먹고 사는 문제가 시급해 ‘돈 많이 버는 의사’가 될까도 생각했었지만, 그림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했기에 쉽게 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늘 마음이 허전하고 공허할 때면 뒷동산에 올라가 풍경화를 그리던 터라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형제 중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있어서 보고 성장했어요. 혼자서 몰래 몰래 그림을 그리다 미대에 가게 되었는데 어머니의 반대가 크셨죠. 당시는 그림 그리는 환쟁이가 크게 환영받지 못하던 시대라 배곯고 산다고 싫어하셨죠. 당시 제 방에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깊은 꿈도 꾸었는데, 어딜 가나 아버지가 제 눈에 밟히는 것 같아서 많이 울었습니다. 분단의 비극으로 아버지가 북쪽에 살아계시는 것 같은 착각에 지금도 쉽게 포기할 수 없죠.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방구석에 혼자 앉아 그림을 그리기에 열중했죠. 노트에 아버지 얼굴 그린 것이 계기가 되어 열심히 그림을 그렸죠.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행복했어요.”

당시 어머니는 개화기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기독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15세의 나이로 시집와서 불교집안이던 아버지 본가를 전부 기독교로 교화시켰다. 덕분에 김수익 화백 역시 모태신앙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김수익 화백을 목회자로 키우고 싶어했다. 그런 어머니를 상대로 김수익 화백은 ‘그림이 자신의 신앙’이라는 것을 설명해야 했다. 여러 가지 설득 끝에 ‘교사가 되겠다’고 허락을 받고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하루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 그림에 전념하며 어머니의 기대치를 채우려 노력했다. 그리고 인생의 매 순간 집중하며 그렇게 사는 데 가치를 두었다. 그리고 홍익대를 거쳐 경희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1969년 드디어 25세 때 한국 최초로 최연소 동아대 미대 교수가 된다. 이어 그곳에서 6살 연하의 제자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고 20여 년간 교수로 재직하다가 1989년 (사)한국현역작가회를 꾸려 자리를 옮기게 된다.

 

진정한 작품세계 위한 ‘화가의 길’

김수익 화백은 예술의전당 등 국내 여러 화랑에서 총 13회에 걸친 개인전을 가졌다. 또한 일본이나 미국 등지에서 200여 회 단체전과 초대전을 개최했다. 때문에 국내보다는 해외에서 더 많이 알려진 서양화가다. 그는 이미 홍대 미술학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던 시절, 총학생회장을 맡아 유명세를 떨쳤다. 뿐만 아니라 대학 4학년 때 남산에 있던 드라마센터(현 남산예술센터)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며 작은 영화사를 차리기도 했다.

“홍대 다닐 때 학교 대표로 운동선수를 했어요. 그리고 4학년 때는 충무로에 영화사도 차렸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다하고 다녔어요. 그 이전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승마도 했죠. 지금도 하고 싶은 일에는 적극적으로 도전합니다. 그게 열정적으로 사는 것 아닙니까. 그러다가 일본 후쿠시마에서 전시회를 개최할 때 고베지진도 봤어요. 그리고 중국에서 비행기 타려고 하다가 사고가 나서 추락하는 현장도 목격했죠. 이런 일들을 겪다보니 산다는 것이 안개와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후 숨 쉬고 사는 게 소중하게 여겨지고, 세상을 아름답게 보려는 마음이 생겨서 무엇이든 시작하면 절대 포기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저력 덕분에 그는 지금도 아침 8시면 어김없이 작업실로 향한다. 현재 살고 있는 서초동 아파트 바로 옆 상가건물 3층이 그의 작업실이다. 10년 전부터 작품에 더욱 매진하고 싶어 외부 활동을 줄이고 그림 그리는데 열중했다. 그의 그림은 현재 서양화 1세대들의 작품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향수’를 내적 정서로 간직하고 있다. 과거 나라와 언어를 상실한 피지배 민족의 아픔과 남북분단으로 인해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다.

하지만 김 화백의 그림에는 그런 절절한 슬픔대신 아련한 그리움이 들어 있다. 따뜻함과 포근함이 짙게 깔려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훈훈하게 한다. 그가 그리는 작품은 유년과 고향을 테마로 한다.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연유한 것이지만 관객 역시 공감할 수 있는 정서여서 더욱 잔잔한 감동을 준다. 작품 속의 밝고 따뜻한 이미지는 그가 애용하는 황갈색, 베이지색, 분홍색, 회색, 보라색 등의 색감에서 비롯된다. 또한 그림 속에 등장하는 벌거벗은 아이들은 유년의 초상이고,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은 한국의 여인들이다.

이렇게 15년 이상 작품 활동을 전개한 작업실은 매우 잘 정리가 되어 있다. 많은 그림이 그의 작업실에 난립해 있지만 그 속에서도 정리정돈은 철저하다. 근래 그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집에 그림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고 밤샘 작업을 마쳤다. ‘그 과정이 너무 행복했다’고 고백하는 김수익 화백. 지금껏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인본주의 작품세계를 추구하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화가로 널리 명성을 떨친 그가 차세대를 위한 그림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그리움을 향한 한국인의 표상

일찍이 미술평론가인 고(故) 이일 선생은 그의 그림을 두고 “그의 작품은 대체로 인물을 주요 테마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엄격한 의미에서의 인물화나 초상화는 아니다.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에는 항상 풍경, 아니면 정물이 곁들여져 있으며 또한 그 인물들은 대개의 경우 여성인데 그 어떤 특정 인물이 아니라, 일종의 전형화(典型化)된 인간상이다. 그것도 한국적인 인간상들이다. 그리고 그의 인간상과 그 동반자로서의 풍경이나 정물이 서로 교감하며 하나가 되어 은밀한 정감의 세계를 창출해 내고 있다”고 평한 바 있다.

김수익 화백은 어떤 풍경이나 정물을 그 자체로서 그다지 큰 의미를 지니고 부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인간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보다 인간화된 자연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름 아닌 인간과 자연과의 내면적인 교감을 통해 비로서 가능한 세계라고 제시해 준다. 그것도 본질적으로 정감적인 교감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 등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아온 김수익 화백은 자신이 일궈온 예술을 바탕으로 향후 한국의 문화전도사 역할을 자처한다. 사회적 정서를 순화하는 일도 병행하면서 사람들에게 정신문화의 가치를 높이는 일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낸다. 그를 위해 김수익 화백은 서초구 양재동 일대에 사람이 문화예술을 접하고 배울 수 있는 ‘미술관’을 건립하는 데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양재동 하나로마트 근처에 미술관을 짓게 되면 지금껏 활동한 제 모든 것, 삶의 흔적들을 모두 모아 새로운 창작을 위해 전시하고 싶다”고 들려주는 그.

어머니의 사랑, 가족사랑, 이웃사랑, 동심 등을 작품의 테마로 삼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김수익 화백은 보는 이에게 인간의 원초적인 물음을 던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함축된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그의 세계관과 인생관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을 관객과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해 보여주고자 한다.

현재 성남아트홀과 잠실 롯데아카데미 문화센터에서 유화와 누드크로키 등의 강의를 나가며 주부들 가르치는 일에 커다란 보람도 느낀다고 말하는 그. 여가를 선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함께 그림을 그리며 삶과 자연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이 매우 즐겁다고 한다. 미술관이 들어설 자리에 과실수와 벚나무, 사과나무 등을 심고 가꾸며 그곳에서 소신 있게 사는 매력을 보여주는 김수익 화백의 나날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11-04-09 07:18:47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