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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지명밟기 이야기 시리즈 17–봉황의 능 ‘두험소’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지 못 하는 신동명박사의 단순 능력 때문에 우리는 바로 전 시리즈에서 하나의 숙제를 남겨놓은 채 의정부 지명밟기 이야기 시리즈 –17로 넘어 오게 되었다는 걸 다들 알고 계시죠?

상기해 보면 저번 시리즈에서는 '황제의 나무'와 '황제의 관(棺)'과 관련된 이야기를 먼저 해체하고, 이번 시리즈에서는 ‘봉황의 능(陵)’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약속했더랬습니다.

그래서 약속한대로 이번 시간엔 '황제의 관'에 모셔진 신성한 새의 무덤이 되는 ‘봉황의 능'은 어디로 정했는지에 대하여 해체쑈를 펼쳐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신동명박사의 해체쑈~쑈~쑈.

‘황제의 나무’로 만든 '황제의 관'에 모셔진 봉황.

우리 선조님들은 신성한 봉황이 묻힐 '봉황의 능'을 어디로 정하셨을까요?

이것을 추적할 수 있는 다빈치코드는 '두험천(豆險川)'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두험천(豆險川)'은 조선 25대 왕 철종 때 고산자 김정호가 편찬, 간행한 대동여지도 13첩 4면에 ‘중랑천’의 옛 지명으로 당당히 등장합니다.

지도에 보면 의정부라는 이름은 없는데(사실 위에 견주(見州)라는 지명이 옛 의정부 지명이긴 합니다만), '두험천(豆險川)'이라는 표기는 있군요.

그렇다면 당시에 꽤나 유명했다는 것이 되는데...'두험천'이라는 이름이 선조님들에게는 얼마나 유명했을까요? 

지금의 ‘중랑천’을 고산자 김정호가 편찬, 간행한 대동여지도 13첩 4면에는 ‘두험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샛강’이라 불렸다.

그것을 추적할 수 있는 근거가 의정부 행복로에 남아 있습니다.

의정부가 '두험천참(豆險川站)'이었다는 안내문이 그것입니다.

고인돌을 7개씩이나 없애 버린 의정부에서 안내문이라도 하나 남아 있으니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 

이성계동상 반대쪽 행복로 끝부분 포천로터리 방향에 가면 '두험천참(豆險川站)'에 대한 안내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선 14대 왕 선조 때 ‘두험천참’이라는 파발막을 현재의 포천로터리에 두어 운영하였죠. 그러니까 ‘두험천참’은 ‘두험천’ 근처에 있는 파발막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좀 더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의정부라는 지명보다는 ‘두험천참’, ‘두험천’ 등이 의정부라는 지명을 대신하여 쓰였을 정도이니 굉장히 유명했던 거죠.

행복로 포천로터리 방향에 세워져 있는 안내문

그런데 우리가 주지해야할 내용은 '두험천'이 중랑천(中浪川)의 옛 이름이었다는 것이고 ‘두험천’의 옛 이름은 '샛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샛강’이라?

이 글을 연재 하게 만든 그 강! 

의정부를 동서로 가르며 척추처럼 흐르는 그 강!

봉황이 날아다녔다는 그 의미심장한 물줄기! 

마한 모수국 시절에 옥재의 청옥을 중국에 수출할 수 있게 해주었던 역사의 젖줄.

이토록 소중한 ‘샛강’에 우리 선조님들은 왜? 굳이? ‘두험천’이라는 새로운 지명을 만들어 부르셨을까요? 요거 요거 다빈치코드라는 느낌이 확하고 달려드는 부분입니다 그려. 

우리 선조님들이 어떤 분들입니까? 이름을 만들어 붙일 때에는 후손들에게 잊지 말고 후일 반드시 찾아오라는 뜻을 담아 역사의 징검다리를 만들어 놓는 배려 넘치는 분들 아니십니까! 

하필 거름(똥) 냄새 풀풀 날 거 같은 '두험'이라는 지명을 남기실 때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았겠습니까! 

자 그럼 지금부터 선조님들이 준비해놓으신 역사의 징검다리를 하나씩 두드리고 건너면서 선조님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봉황의 능’과 관련된 역사를 접근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의정부 선조님들은 '두험천(豆險川)'의 시작을 '두험소(逗驗沼)'로 보았습니다.

'두험소(逗驗沼)'의 물이 흘러 ‘샛강’에 이르니 '두험천(豆險川)'이라 불렀던 것이고요.

그러니까 선조님들은 의정부의 시작을 '두험소(逗驗沼)'로 보았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소(沼)'란 일반 연못이 아니라 바위에 있는 움푹 들어간 넓은 연못을 뜻하는 말입니다. 

'소(沼)'가 바위에 있는 움푹 들어간 넓은 연못을 뜻한다면 의정부 '두험소(逗驗沼)'의 크기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정말 거대했다고 합니다. 의정부 토박이 김수원(51년 출생. 72세)님의 말을 빌리면 현재 의정부역의 랜드마크인 해태 프라자에서 의정부 2동 동사무소 자리까지였다고 하니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던 거죠. 그러면 넓이만 넓었던 것이냐? 그 깊이는 명주실 한 필이 다 들어가고도 모자랐다고 하니 깊이 또한 상상초월. 이렇게 크고 깊은 '두험소(逗驗沼)'는 일반적인 소(沼)가 아니라 바다처럼 넓고 거대한 호수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사패산(고구려 때는 갓바위산)과 홍복산(백제 때는 노고산)에서 시작한 물이 연내, 안골, 직골을 거쳐 내려온 물이 '두험소(逗驗沼)'에 모였다가 봉황이 날아다니는 샛강을 향해 큰 내를 이루고 흘러갔을 터이니 그 웅장함은 가히 ‘조선 제일의 연못(沼)’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듯합니다.

이 웅장하고 깊었던 '두험소(逗驗沼)'가 바로 우리가 찾는 ‘봉황의 능’입니다.

신라의 문무왕을 바다 속 대왕암에 모셔졌듯이 바로 이 '두험소(逗驗沼)' 자리에 우리 조상님들은 ‘봉황의 능’을 모셨죠.

이건 너무 비약하는 거 아냐? '두험소(逗驗沼)'가 ‘봉황의 능’이라니? 어디에도 그런 말은 없었던 거 같은데 학자라는 사람이 이런 비논리로 글을 쓰면 되는 거냐며 따지실 독자들이 계실 거라 봅니다. 그렇다면 저랑 내기를 하나 합시다. '두험소(逗驗沼)'가 굉장히 신성한 장소라는 것을 증명해서 누가 봐도 ‘봉황의 능’으로 쓰이는 것이 맞겠다는 합리적 결론을 도출 시킨다면 '두험소(逗驗沼)'가 ‘봉황의 능’이라는 신동명박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시는 걸로!

 

'두험천(豆險川)'과 '두험소(逗驗沼)'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자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둘 중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더 오래 된 것이냐를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따지고 따지고 따져 들어가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두험천(豆險川)'의 ‘두(豆)’와 '두험소(逗驗沼)'의 ‘두(逗)’에는 ‘두(豆)’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 글자가 우리 조상님들이 전달하고자 했던 뜻을 품은 글자라고 봐야 옳을 겁니다.

자! 지금부터 ‘두(豆)’라는 글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따져들어 가 보도록 합시다. ‘두(豆)’는 보통 ‘콩 두(豆)’ 정도로 아시겠지만 그 근원적인 뜻은 '제사지낼 때 신위의 오른 편에 고기, 젓, 국 따위를 담아놓는 나무로 만든 제기'를 뜻하는 글자입니다. 즉, 제사와 관련되어 있는 한자인거죠.

그러니까 우리 조상님들은 '두험소(逗驗沼)'에서 제사를 지냈던 것이 되네요.

그렇다면 이제 ‘두험’에서 ‘험’자를 정리해 볼까요? 

'두험천(豆險川)'의 ‘험(險: 높다, 험하다)’과 '두험소(逗驗沼)'의 ‘험(驗: 시험하다)’에는 ‘僉(다 첨, 모두 첨, 우리 첨, 도리깨 첨)’이라는 글자가 공통적으로 들어가 있군요. 역시 이 글자에 우리 조상님들이 전하고자 했던 뜻이 숨어 있다고 보시면 정확한 접근입니다.

우리는 이 ‘험’이라는 글자를 통해 '두험소(逗驗沼)'에서 제사를 지내는 대상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이 ‘험’자라는 글자들을 들여다보니까 어디서 많이 봤다는 느낌적 느낌? 

이상하게 낯 설지가 않죠. 혹시 검(儉: 검소할 검) 또는 검(劒: 칼 검)이라는 글자가 기억나지 않으셨나요? 단군왕검(檀君王儉) 또는 단군왕검(檀君王劍)에서 보셨을 수도 있고요. 

두험천의 ‘험(險: 험할 험)’이 되었든, 두험소의 ‘험(驗: 시험 험)’이 되었든, 단군왕검의 ‘검(儉: 검소할 검)’이 되었든 모두 ‘첨(僉: 여러 첨)’이라는 글자가 공통으로 들어가 있네요. 

‘첨(僉)’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첨(僉)’은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을 사람다운 사람(人)들이 잘 알아듣는 모양’을 나타내면서 ‘合’+‘兄’이 합쳐진 글자로 많은 사람 중에 우리머리가 되는 사람을 뜻하는 글자입니다. 즉, 제정일치 시대의 제상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글자인 거죠. ‘僉(첨)’자는 제사장이라는 신적 권위를 가지면 ‘첨’이라는 발음에서 ‘검’이라는 발음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僉(검)’자가 들어간 ‘劍(칼 검), 檢(검사할 검), 儉(검소할 검)’ 같은 글자들은 오늘날도 생사여탈의 권위를 가진 글자로 남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죠. 

이렇게 접근을 해보니 '단군왕검(王劍)’과 ‘단군왕검(王儉)’이 한자는 다른데 같이 사용되었던 이유가 비로소 풀리게 되는군요.

여기서 한 발 더 내딛어 해석해보면 글자 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은 ‘검’이라는 소리입니다.

‘검’은 ‘곰’을 뜻하는 한민족의 ‘고어’로써 곰, 검, 감, 김, 금, 가마, 가미 등의 발음으로 변천하게 되는 글자이고 단군왕검 즉 신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나타내는 글자입니다. 이 글자가 어떤 글자는 곰나루로 남아 있다가 웅진이 되기도 하고 공주가 되기도 하고, 단군직할지인 진한에서 마한으로 내려온 신라왕족들은 자신들을 ‘僉의 사람’이라 하여 ‘김[金]씨’라 하고, 김씨 중 가장 높은 사람을 ‘임금’이라 부르는 흔적으로 남기도 하죠. 우리 조선 고어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일본의 경우도 ‘가미=僉의 사람’라는 모습으로 남아 영적인 존재 ‘신(神)’을 나타내는 글자로 남기도 합니다.

최종 정리해보면 ‘첨(僉)’은 한자로 해석하든, 우리 고대 조선어의 흔적으로 해석을 하든, 모두 제사장이자 단군을 뜻하는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접근하고 보니 '두험소(逗驗沼)'는 단군 또는 신(神)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제사를 지냈던 곳이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됩니다.

이제 비약적이었던 제 논리를 합리적으로 정리할 때가 된 거 같군요.

봉황을 사람처럼 계급 계층으로 나누어 본다면 어느 정도의 위치였을까요?

단군왕검이나 제사장의 아래였을까요?

봉황이 단군왕검보다 또는 제사장 보다 높은 위치라는 걸 인정한다면

어떤 장소에 ‘봉황의 능’을 써야 마땅한 걸까요?

당연히 '두험소(逗驗沼)'에 모심으로써 그 권위를 지켜드리려 하지 않았을까요!

기실 따지고 보면 '두험소(逗驗沼)'라는 지명은 ‘봉황의 능’으로 쓰여 지기 전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것이 ‘봉황의 능’으로 쓰이면서 비로소 '두험소(逗驗沼)'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추리가 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이렇게 정리가 되었을 때 비로소, 오랜 시간 ‘샛강’이라 부르던 지명을 굳이 '두험천(豆險川)'이라는 새로운 지명으로 바꾸어 부르게 된 역사적 미스테리가 쾌도난마하게 풀리게 되는 것이죠.

어떠세요. '두험소(逗驗沼)'가 ‘봉황의 능’이라는 저의 주장이 아직도 비약적인가요?

아니면 합리적이고 타당한 주장인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두험소(逗驗沼)'는 ‘봉황의 능’이 맞습니다.



신동명 박사

세한대학교 사회복지상담학 책임교수

-전국지명밟기운동본부 총재

-저서: 역사소년 신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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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4-15 1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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