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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서노의 무덤을 찾아서-2 (SBS 대모산에 '墓' 한자가 떡하니 박힌 돌무덤의 정체는? 방영 이후 수정된 내용임)
  • 기사등록 2023-11-04 16:44:33
  • 기사수정 2023-11-04 16:4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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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서노의 무덤을 찾아서-2 (SBS 대모산에 '墓' 한자가 떡하니 박힌 돌무덤의 정체는? 방영 이후 수정된 내용임)

 

‘온조국(溫祚國)‘을 온조와 함께 세운 여제 소서노는 ’오호입성(五虎入城)사건’으로 의정부 회룡분지 범골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을 ‘소서노와 온조대왕의 사라진 13년 이야기 시리즈-8번’에서 신동명 박사는 심도 있게 다룬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시죠? 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기억을 더듬어 보면 기억이 코딱지만큼은 나실 텐데요? 정말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나신다고요! 그럴 리가? 신박신박 신동명 박사의 글이 여러분들에게 사랑받지 못 하고 있는 거군요. 정녕 그런 건가요? 흑.

아무튼 어찌 되었건 저찌 되었건 간에 잃어버린 온조대왕 13년의 역사를 추적하는 신동명 박사의 노력은 계속됩니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봄 (음력) 2월, 경성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나이 61세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하. 소서노는 나이 61세에 사망했고, 그 때가 기원전 6년 온조왕 13년 되는 해 2월이었군요. 그렇다면 최고의 권력자이자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딘가에 능을 조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여름 5월 왕은 신하더러 이르기를 "국가가 동으로 나라(樂浪)가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략하여 편할 날이 없는데 하물며 궂은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아무래도 편안할 것 같지 않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어제 내가 한강의 남쪽을 순시한 바 토지가 매우 기름지다. 거기에 도읍하여 장구의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가을 7월 한산 아래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기었다.

 

十七年春(십칠년춘) : 17년 봄, 

樂浪來侵(락랑래침) : 낙랑이 침입하여 

焚慰禮城(분위례성) : 위례성을 불태웠다. 

夏四月(하사월) : 여름 4월, 

立廟以祀國母(립묘이사국모) : 사당을 세우고 왕의 어머니에게 제사지냈다.

三國史記 第 二十三卷(삼국사기 제 23권) 百濟本紀 第 一(백제본기 제 01)

아무리 소서노의 죽음이 온조왕과의 정치적 갈등 때문이라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무덤을 조성하지 않았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재밌는 건, 분명히 하남에 내려가서 여제 소서노의 사당을 세웠다는 기록은 있는데 소서노 ‘능의 위치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는 거.

 

그래서 여러 가지 자료를 토대로 합리적 의심의 검색엔진을 심하게 돌려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몇 톨 안남은 대머리 박사 신동명의 머리털이 몇 개 빠지는 아픔이 동반되었다는 사실은 안 비밀...ㅠㅠ. 

그렇게 해서 도출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온조왕 13년 (음력) 2월에 여제 소서노가 훙거(薨去)했고, 그 해 5월에 매우 급하게 하남으로 내려 간 후 4년 뒤 하남위례성에서 사당을 지었다면, 소서노의 능은 온조왕 13년 3~4월 즉 2개월 이내에 급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2. 그렇다면 먼 곳이 아닌 곳. 사건이 터진 의정부 범골 또는 초기 하북위례성의 영역 안의 어디엔가 장사를 지내고, 무덤을 조성했을 것이다.

3. 무덤을 조성했으나 2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때문에라도 무덤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단 제사는 웅장하게 지냈을 것이니 그 흔적은 지명에 남아 있을 확률이 높다.

4. 대를 이어 관리를 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산제사나 축문, 토착집안의 족보 또는 내력, 전설 등에 흔적이 남아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고민을 하던 중 의정부지명밟기운동본부 회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2022년 9월 24일 토요일 오후4시(참가자: 김수원(72세), 신동명(60), 정창현(57))에 ‘대모산성’ 정상을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미증유(未曾有)의 무덤 하나를 발견하게 되죠. 세상에 딱 하나 밖에 없는 모양을 하고 있는 돌무덤을 마침내 발견하고야 만 겁니다.

전체가 돌로 만들어진 이상한 모양의 무덤 하나. 

무덤 정중앙에는 ‘묘(墓)’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봉분과 상석, 용미와 사성까지 전체가 돌로 이루어진 여직이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무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의정부지명밟기운동본부 회원들은 스무 하루 동안 지독한 신열(神熱)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궁금증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집채 만한 파도가 되어 ‘소서노의 흔적’을 어서 나가 찾아보라 보이지 않는 손이 등을 떠밀어대니 마침내 2022년 10월 15일 토요일 오전 10시(참가자: 신동명(60), 정일삼(60), 정창현(57)). 추석이 지난, 그 주에 방문을 박차고 대모산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맙니다. 

그리고 잡풀 가득한 무덤의 풀을 제거하면서 이 무덤이 ‘소서노의 능’일 확률에 대한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가감없이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되죠.

부정적 측면

(정일삼 파)

①‘묘(墓)’라는 글씨가 너무나 선명하다는 것

②사성에 쌓인 돌들에 시멘트가 사용되었다는 것

③망주석의 역할을 하는 부분에 쓰인 글자들이 ‘소서노’ 또는 ‘왕’이라는 글자가 아니라는 거(매우 흐리고 추적하기 어렵긴 하지만)

④주변에 개인 사설 묘지라는 글자가 돌에 쓰였다는 것

긍정적 측면

(김수원 파)

①무덤의 모양이 돌무지 무덤 형태로 봐야 한다는 것

②상석이 무덤의 시작지점부터 끝나는 부분까지 연결될 정도로 대규모라는 것(대규모의 제사를 진행했다는 흔적)

③오른쪽 사성의 받침돌 중 하나로 연결된 큰 돌이 금이 갈 정도라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버텨온 무덤이라는 것

④무덤의 방향이 호원동 범골을 정방향하고 있고, 동북쪽으로는 오녀산성을 닮은 불곡산의 능선이 펼쳐져 있다는 것 

사물을 보는 시각은 서로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저는 김수원 파의 입장이기에 왜 이 무덤이 ‘소서노의 능’인지를 피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이 시멘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때가 언제일까요? 한 100년 조금 넘는다지요. 즉 일제 통치 때부터 사용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명 하나를 건드려 볼게요. 앞의 글에서 신동명 박사가 ‘고능리(古陵里)’라는 이름이 언제 등장한다고 했죠? 1895년 일본군사지도에 처음 등장한다고 말씀드렸죠!

이 부분에서 이미 그들은 대모산성의 이 ‘돌무덤’이 ‘고대의 역사를 품고 있는 능’이라는 것을 알고 조사를 끝 맞친 후 ‘고능리(古陵里)’라는 지명으로 지도에 기록해 놓았다고 봐야 타당한 추리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을 조금 더 발전시킨다면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일본넘들이 ‘고능리(古陵里)’에 대한 모든 조사를 끝내고, ‘오래 된 능이 있는 산성’인 대모산에 올라가 무너져 가는 돌무덤을 시멘트 작업을 허여 지탱시켰다라는 추리가 가능해지는 대목입니다. 시멘트를 발라 지탱시킨 경우는 이 돌무덤 뿐 아니라 경주의 다보탑이나 석가탑도 똑같은 사례를 보입니다.


의정부 호원동 범골(온조국 하북위례성)과 직선으로 이어져있는 대모산성의 돌무덤

대모산 무덤 동북 방향으로 훤히 보이는 불곡산의 능선. 고구려 오녀산성을 닮았다. 

고구려와 같은 강력한 국가를 꿈꿨던 소서노와 온조의 염원이 느껴진다.

고구려 최초의 수도 ‘오녀산성’.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번시시(本溪市) 환런현(桓仁縣)의 오녀산(해발 806m)에 있는 고구려 왕성 유적


이즈음에서 저는 SBS 모닝와이드 3부 ‘알고 보면’-‘대모산에 '墓' 한자가 떡하니 박힌 돌무덤의 정체는?’이라는 취재 내용에 대하여 다루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 글은 2023년 9월 13일 이후 수정하여 올린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미지 앞부분 까지는 그 전에 쓴 글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고, 이 내용 이후는 수정 보강된 내용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입니다.

 

2023년 9월9일 부산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모르는 전화번호가 뜨더니 “SBS 모닝 와이드 작가”라고 하면서 “소서노 무덤을 찾았다는 글을 보고 취재를 하기 위해 월요일 급하게 인터뷰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소서노 여제의 무덤이 드디어 세상에 빛을 보는구나 하면서 강의가 끝나고 다음날 일요일 부랴부랴 올라가고 있는데, 다시 전화가 와서는 대뜸 “위에서 더 조사를 하라고 인터뷰를 취소하라”고 했다면서 “소서노 무덤에 대하여 박사님이 최고 권위자이니까 다음에 취재하게 될 때 꼭 모시겠다”고 하면서 일방적으로 약속을 취소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느낌이 이상해서 유투브에 들어가 봤더니 왠 걸? ‘알고 보면’-‘대모산에 '墓' 한자가 떡하니 박힌 돌무덤의 정체는?’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방영이 되었지 뭡니까!

해서 취할 건 취하고 남는 의문에 대한 내용은 문제를 제기하는 형태로 글을 진행해 나가고자 합니다.

지명밟기회원들은 SBS 덕분에 대모산을 중심으로 가장 장수하시는 90살 된 김병선 할아버지도 찾게 되고 대모산이 ‘소서노의 능’이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김두영(67세)어르신도 찾아내게 되는 등 솔찬은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우선 SBS로부터 얻게 된 소중한 정보는 두 가지, ‘묘(墓)’자가 쓰여진 돌무덤의 양식은 우리가 처음 추정했던 돌무지무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제 강점기 유행했던 견치석이라는 형태였다는 것과 오산 삼거리에 사는 지역 유지 노태삼 어르신의 무덤이었다는 것.

앗? 그러면 모든 논의는 끝난 것이 아닌가? 노태삼 어르신 무덤이라는데 더 무슨 이야기가 진행 될 수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우리의 의문은 노태삼 어르신 무덤부터입니다.

SBS는 왜? 무덤만 취재를 했을까요? 

분명히 묘자리에 올라가면 둘레석은 묘자리보다 훨씬 오래된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일본 사람들이 무너져 가는 둘레석을 시멘트로 유지 시켜 놓은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는데 굳이 무덤만 취재했을까 하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성의 받침돌 중 망주석의 역할을 하는 부분에 쓰인 글자에 대하여는 왜 아무 이야기가 없었느냐 하는 겁니다. 돌에 낀 이끼와 글자의 부식을 보더라도 굉장히 오래된 둘레석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왜 하필 무덤만 취재했느냐 이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90세 김병선 어르신의 말을 취재하면서 대모산의 노태삼 어르신의 무덤자리가 소서노의 무덤 자리일 확률이 훨씬 더 높아졌습니다.

“내가 중학생 때야. 훈장 선생님과 함께 제사 지낼 물건들을 차려서 대모산에 오른 적이 있지. 왜냐면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서야. 동네가 너무 가물었거든. 그래서 선생님하고 함께 올라가게 되었지. 그래서 기우제를 지냈더니 먹구름이 끼고 비가 내렸어. 근데 개미 눈물만큼 내렸어. 대모산에는 명당자리가 딱 하나 있는데, 거기에 묘를 쓰면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그러더니 정말로 그러더라고. 노태삼씨가 묘를 써서 그랬는지?” 

이게 왜 소서노 여제랑 연결되냐고요?

후세의 사람들에게 대모산에 감히 묘를 쓸 엄두를 내지 못 하도록 경고의 메시지를 남겨 지키려 했던 무덤이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제가 김병선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그 무덤 자리가 명당자리인가요?”

“명당자리지. 아주 좋은 자리지.”

그래서 제가 재차 물었습니다.

“그럼 노태삼 씨 무덤 밑에 다른 사람의 무덤이 또 있을 수도 있겠네요?”

“옛날에는 비일비재했지. 옛날에는 묘를 쓰기 위해 명당자리를 파면 그 밑에 다른 사람이 이미 묘를 쓴 것들이 자주 나타났어.”

그래서 제가 또 다시 물었습니다.

“무덤 주변에 둘레석이나 사성의 받침은 노태삼씨 무덤과 달리 매우 오래 되어서 돌이 갈라지기도 하고 이끼가 끼기도 하고,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건 아세요?”

“그래? 그건 전혀 모르는 내용인데? 노태삼씨 묘를 쓸 때는 그런 게 없었는데?”

“아주 오래된 둘레석이 있습니다.”

“노태삼씨 무덤에서는 없었어. 금시초문인데? 한 번 올라가봐야겠네.” 

녹취록을 대충 정리하면 위의 내용이었고 노태삼씨의 무덤은 소서노의 무덤 위에 쓰였을 확률이 농후해지는 이야기로 집약이 되는 중인 겁니다.

이러한 예를 세계적으로도 많이 일어나는 일 아닙니까?

청동기 시대 이후 우리는 그 자리에서 계속 살았으니 층층이 역사가 다르게 쌓여 발견되는 것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발견될 수 있는 거죠.

그 대표적인 사건이 하인리히 슐리만의 ‘트로이의 목마 유적 사건’ 아니겠습니까!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SBS가 증명하지 못한 양주대모산성의 무덤에 대한 의문을 집중적으로 제기해 보겠습니다.

90세가 되신 김병선 어르신도 몰랐다는 곡장(曲墻: 둘레석)은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노태삼 어르신이 이 대모산성을 개인 땅으로 소유하기 이전부터 이 둘레석이 있었다는 건데, 그러면 절대권력 절대왕정 시대에 누가 감히 왕의 땅인 산성에 무덤을 사용할 수 있었을까요?그것도 산성 정상 가운데 자리에 떡 하니 말입니다!

과연 절대권력 절대왕정 시대에 개인이 여기에 무덤을 쓸 수 있었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자 직선거리인 의정부 호원동 회룡분지에 ‘소서노 사망 사건’이 일어났고, 어하라(於瑕羅: 고주몽이 소서노에게 내린 임금의 호칭)의 어(於)자가 들어간 지명(어룡리, 어립개, 어능리, 어둔리, 어하(於瑕)고개)이 대모산을 중심으로 수두룩한 이곳을, 

능의 남쪽을 방어하라는 명령이 담긴 남방리, 대모산성을 지키라는 방성리, 그 산성에 능이 있다고 알려주는 능안말. 일본 놈들조차 인정한 오랜 능을 간직한 마을 고능말(1895년 일본 군사(침략)지도에 처음으로 등장 마을 이름) 등 능과 관련한 지명이 수두룩한 이곳을,

고구려의 첫 출발지인 오녀산성을 닮은 불곡산이 훤히 보이는 대모산에

어하라(於瑕羅) 소서노의 능이 있다고 추정하는 우리 지명밟기회원들의 발상이 인정받지 못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동명 교육학박사

 

현) 서정대 사회복지상담학과 외래교수

현) 전국지명밟기운동본부 대표

저서: 역사소년 신새날, 십대토론, 행복한 수다가 치매를 예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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