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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를 다시 품다-10-議政府인가? 議情阜인가?

 

전국 어딜 가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나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왜? 의정부라는 지명을 쓰나요?

아마도 이 질문의 핵심에는 ‘왜? 그 동네는 조선 관청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나요?’라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의정부에 오래 산 사람들도 이 질문에 명쾌히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죠.

현재 조사된 기록으로는 1787년 노상추 일기에 사용된 의정부(義正部), 1796년(정조 20) 승정원일기에 사용된 의정부(議政府), 고산자 김정호가 1864년 발간한 전국지도인 ‘대동지지(大東地志)’에 쓰인 의정부(議情阜) 이렇게 세 가지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가장 대중적으로 퍼져 있는 내용은 ‘태상왕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 호원동 전좌마을에서 화해를 해서 생겼다.’라는 것이고, 가장 신빙성 있는 주장으로는 의정부의 옛지명 중 본둔야(本芚夜), 둔야(芚夜)면 등에서 보여지는 ‘둔(芚)’이 ‘둔(屯)’이고, ‘議政府’가 경작하는 ‘衙門屯(아문둔)’의 둔(屯)이어서, 의정부(議政府)라는 행정기관에 공납을 하던 지역이었기에 현재의 의정부(議政府)라는 지명(地名)이 된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정부지명밟기운동본부 신동명 박사와 회원들이 나서서 무슨 소리냐? ‘의정부는 議政府가 아니라 ‘의순공주의 그리워하는 언덕’이라는 뜻이 담긴 고산자 김정호의 ‘議情阜다.‘라는 주장을 하며 적잖은 파장이 일어납니다.

오늘 이 글은 이러한 논란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의정부 사람들이 외지의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의정부를 설명 할 수 있는 정리된 자료를 남기는 것이 목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의정부는 議政府가 아니라 議情阜다.’라는 사실이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 새로운 기록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해 봅니다.

덧붙일 내용은 노상추의 일기는 개인적인 표기이기에 논쟁거리에 속하지 않으므로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우선 먼저 ‘의정부’를 의정부(議政府)라는 행정기관에 공납을 하는 흙수저의 동네로 전락시킨 ‘둔(屯)’에 대한 그동안의 주장에 대하여 신랄하게 뽀개면서 이 글이 도착하고자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 짐작하는 글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도수희 교수는 ‘새국어생활 제9권 제3호(’99년 가을)’에서 이런 글을 남깁니다.

가령 지명소 ‘둔’(屯· 芚)은 ‘屯谷, 屯山, 大芚山, 月屯,達屯, 生屯~’ 등과 같이 전국적으로 흔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 중에서 대전광역시의 신시가지로 부상한 이른바 ‘屯山지구’의 ‘屯’을 예로 들어 보자. 이 곳에는 마침 삼관구사령부, 공군기교단, 통신학교 등의 군부가 8.15 광복 이후부터 상당한 기간에 걸쳐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신시가지가 조성되기 직전에 모두 이전하였다. ‘오비이락’격으로 지명소의 표기에 차자된 ‘屯’자의 의미와 기막히게 적중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屯’자는 훈차자가 아니라 음차자일 뿐이다. ‘德頓忽:十谷城 買旦忽:水谷城 於支呑:翼谷’ 등의 ‘頓 · 旦 · 呑 = 谷’와 같이 고대국어에 뿌리 박혀 있는 ‘谷’의 의미인 고유 지명소 ‘둔’을 ‘屯’자로 음차 표기한 것으로 봄이 마땅하다. 이 ‘둔뫼’(屯山)에서 선사유적(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이 발굴된 사실이 아주 이른 옛날부터 ‘둔뫼’라 불리어 왔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엉? ‘둔(屯)’이 군인들이나 관청에 공납하는 땅의 이름이 아니라고?

‘둔(屯)’은 오히려 ‘곡(谷)’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라고라?

선사시대부터 ‘둔(屯)’이라는 말이 있었다고라고라?

그러면 의정부에 존재하는 본둔야(本芚夜), 둔야(芚夜)면이라는 지명의 ‘둔(屯)’을 끌어들여 ‘의정부’는 ‘의정부(議政府)라는 행정기관에 공납하는 ‘衙門屯(아문둔)’이 있었기에 만들어진 지명이다라고 주장하는 내용은 더 이상 존립의 가치가 사라지는 건데! 

아이고! 그러면 그동안 그 내용으로 밥 짓고 숭늉까지 우려먹은 학자들은 이제 뭐 먹고 살지? 

방향을 잘 못 잡아서 죄송하다고 의정부 시민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할까? 아니면 본둔야(本芚夜), 둔야(芚夜)면이 ‘衙門屯(아문둔)’이었다는 문서를 찾아내어 누가 맞는지 다시 한 판 붙어보자고 버팅길까? 못내 궁금하네 그려.

그렇다면 도수희 교수가 대전의 둔산(屯山)지구의 예를 든 것처럼, 의정부의 본둔야(本芚夜), 둔야(芚夜)면도 선사시대의 역사를 품고 있을까요? 그래야만 조선시대에 사용된 ‘둔(屯)’ 아니라 고대시대부터 ‘둔(屯)’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는 건데?

맞습니다. 본둔야(本芚夜), 둔야(芚夜)면은 의정부 고대사를 품고 있는 소중한 지역입니다. 그건 제가 눈으로 봤고, 의정부 토박이들이라면 모두가 증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왜냐? 제가 본둔야(本芚夜), 둔야(芚夜)면에 위치한 영석고등학교를 나왔거든요. 움화화화. 당시 복지고등학교. 볕고개 정상에 있는 그 고등학교를 당시 논길로 해서 자전거 타고 학교를 다녔거든요. 그래서 비디오처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죠.

우선 신곡고가차도부터 시작되어 용현 솔뫼초까지 이어지는 볕고개부터 해석해드릴게요.

이 볕고개의 옛지명은 ‘곰고개’였습니다. 발음이 와전되어 ‘공고개’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정확한 명칭은 ‘곰고개’입니다. 여기서 ‘곰’은 ‘검’을 뜻하는 다른 표현입니다. ‘검’은 우리가 다 아는 ‘단군왕검’의 그 ‘검’입니다. 신성한 왕의 역사와 관련된 고개라는 뜻이죠.

그래? 그러면 그런 이름에 걸맞는 고대사를 증명할 수는 있는 겁니까?

넵. 있습니다. 영석고 앞의 그 볕고개를 타고 옆으로 흐르는 깊은 계곡이 있습니다. 지금의 ‘용화사’ 앞의 계곡이죠. 도로 옆에 자리한 ‘오형제 손짜장마을’ 뒤쪽을 말하는 겁니다. 제가 고등학생 당시에 이 ‘오형제 손짜장마을’ 자리에 거대한 고인돌 한 기가 있었고요. ‘용화사’ 앞에 거대한 고인돌이 또 한 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정부 초등학교방향으로 내려 가다보면 신곡고가차도 지나서 넓은 벌이 나옵니다. ‘유앤아이 아파트’ 뒷길을 말하는 겁니다. 거기에 ‘청룡부리’라는 거대한 고인돌이 있었죠. 그 고인돌 때문에 청룡부락이라는 이름도 생기고, 청룡초등학교라는 이름도 만들어진 겁니다.

아! 이 정도면 의정부에 존재하는 본둔야(本芚夜), 둔야(芚夜)면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꼴랑 생긴 게 아니라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사용된 것이군요! 대전의 둔산(屯山)지구처럼 말입니다. 

 

자! 그러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이 의정부(議政府)라 지명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그건 1911년 10월 15일 운행을 시작한 의정부역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쓰이게 됩니다. 즉, 일본 정부에 의해 ‘의정부(議政府)’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죠.

우리 의정부지명밟기운동본부 회원들은 바로 이 부분에 의문의 방점을 찍습니다.

‘일본 정부에 의해 ‘의정부(議政府)’라는 지명이 생겼다.‘라는 이 부분.

조선의 혼을 꺾어버리기 위해 창씨개명이라 해서 사람 이름을 개명하고, 그것도 모자라 창지개명(創地改名)이라 해서 땅 이름도 개명한 그들인데 ‘의정부(議政府)’라는 지명을 사용할 때는 또 다른 의도가 숨어있지는 않았을까?

가능동에서 송추로 넘어가는 울대고개 오른쪽에 자리한 ‘어룡(御龍)골’을 ‘어룡(魚龍)골’이라 하여 임금 어(御)자를 물고기 어(魚)자로 강제로 바꾸어 부르게 한 그들이, ‘의정부(議政府)’라는 지명을 가져다 붙이면서 좋은 속셈을 가지고 붙였을까?

우리 회원들은 이 부분을 그렇게 순수하게 평가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없는 지명을 만들어 사용할 때는 많은 고민과 회의를 거쳤을 거라고 봅니다. 조선 땅을 살아온 우리보다 조선 땅의 정보를 더 많이 알고 있는 그들이었으니까요. 더 정확히 알고 있는 일본 정부였으니까요. 의정부 민락 2지구 낙양동의 옥재 동굴에 푸른 옥이 나온다는 것을 의정부 사람들은 모르는데, 그들은 엄청난 양을 캐갔을 정도니까요.

그렇다면 일본 정부가 의정부라는 지명을 찾아내는데 가장 유용하게 참고했을 자료는 무엇이었을까?

저는 두 말없이 고산자 김정호의 지도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를 본 일본 정부는 감탄을 토해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정밀한 지도를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조선에 있다니, 그들은 김정호를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고 합니다.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김정호의 자료를 훑어 봤을 것이고, 그때 이 지역에 붙이면 좋을 이름을 발견했을 겁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 쓰여 있는 의정부(議情阜)라는 세 글자.

신 같은 존재가 쓴 의정부(議情阜)라는 세 글자를 그들은 함부로 다루었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조사를 들어갔겠죠. 의정부(議情阜)라는 뜻이 무엇인지? 사용하기에 적합한지?

여기서 그들은 놀랐을 겁니다. 의정부(議情阜)라는 세 글자에는 ‘의순공주를 그리워하는 언덕’이라는 뜻과 함께 나라를 구한 ‘의순공주의 애국정신’과 청나라를 공격하려 북벌을 준비했던 ‘효종의 자주 국방정신’을 접하게 되었을 테니까요.

자! 여기서 우리 한번 합리적 추리를 해보도록 합시다.

신과 같은 존재가 쓴 의정부(議情阜).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위대한 조선의 정신.

이 두 가지의 갈등에서 일본 정부는 어떤 선택지를 사용했을까요? 

제가 볼 때 그건 ‘어룡(御龍)골’을 ‘어룡(魚龍)골’로 바꾸는 형태를 취하는 게 가장 무난했을 겁니다.

의정부(議情阜)를 의정부(議政府)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죠.

그러면 똑같은 발음을 하는데, 뜻은 와전되고 역사는 왜곡되는 상황이 일어나는 세 가지의 효과.

그래서 김정호의 의정부를 그대로 사용하지만, 뜻은 의정부(議政府)라는 관청에 공납을 하는 논이 있는 흙수저의 동네로 전락시키고, 지명의 역사에서 고대사를 지워버리는 것.

와우. 일타삼피. 일본 정부로서는 많이 남는 장사였네요. 하하하.

 

우리 의정부지명밟기운동본부는 위의 전개된 내용들을 토대로 ‘의정부는 議政府가 아니라 議情阜다’라는 내용을 주장합니다.

어설프게 ‘둔(屯)’자 가지고 곡학아세 하거나, 일제에 의해 왜곡된 의정부(議政府)라는 지명을 그대로 받아들여 혹세무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 고산자 김정호가 전하려 했던 의정부(議情阜) 세 글자의 진실을 세상에 전하고 싶을 뿐입니다.

‘의순공주를 그리워하는 언덕’에 숨은 애국과 자주의 정신을 바로 세우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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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3-01 14: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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