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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지명밟기 이야기 시리즈 25 – ‘범골’ 지명에 관한 새로운 논쟁 ‘범씨(范氏) 집성촌’
  • 기사등록 2022-07-09 18:22:01
  • 기사수정 2022-07-19 09: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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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지명밟기 이야기 시리즈 25 – ‘범골’ 지명에 관한 새로운 논쟁 ‘범씨(范氏) 집성촌’

 

‘범골’에 남아 있는 온조국(溫祚國)과 관련한 총 세 가지 이야기 중 오늘 다루어질 내용은

그 중 두 번째, ‘범굴’이라는 지명이 ‘범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가지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작하자마자 질문 하나!

대한민국에 있는 범씨 성은 ‘범(范)’와 ‘범(凡)’ 이렇게 두 종류의 성씨만 있다고 합니다. 

범(范: 금성=나주 범씨, 풀이름 범씨)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2000년 기준 3,316명이고, 범(凡: 안주 범씨, 무릇 범)씨 성을 가진 사람들은 2000년 기준 157명이랍니다.

여러분들이 보실 때 이 두 범씨 중 어느 범씨가 호원동 ‘범골’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을까요?

‘회룡문화’ 2000년 12월 통권 제9호. 범골과 관련한 마지막 자료집

 

그것을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가 하나있습니다. 

‘회룡문화’ 2000년 12월 통권 제9호. 이 책의 7p에 보면 정말 고맙게도 범(凡: 안주 범씨, 무릇 범)씨가 아닌 ‘범(范: 금성=나주 범씨, 풀이름 범)’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다만 자료집 내용에는 범(范)씨 집성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범골’이 범(范)씨 집성촌과 관련한 지명이라는 주장은 부정적이라는 시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두 범 ‘范’ ‘凡’씨 중에 집성촌을 이루었다면 나주 범(范)씨였을 것이라는 걸 추적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주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아~. 참나. 골아프네. ‘회룡문화’라는 책에서는 ‘범골’이 범(范)씨 집성촌과 관련한 지명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범골’에 사는 사람들은 이 주장에 대하여 부정적이라고? 

그렇다면 ‘범골’이 2,000년 전 온조국의 역사와 관련되었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추적은 여기서 멈춰야 하는 것인가?

아~. 이렇게 되면 모든 게 나가린데. 흑. ㅠㅠ.

어허. 제가 누굽니까 신박신박 신동명 박사 아닙니까?

여기서 포기할 거면 뭐 할라고 시작했겠습니까? 자 지금부터 ‘범골’이 범(范)씨 집성촌과 관련한 지명이 맞다는 주장을 위해 해체쑈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들어갑니다. 집중해주세요. 신동명 박사의 해체 쑈~쑈~쑈.

 

온조대왕의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면 온조국(溫祚國)이라는 나라를 거쳐 십제(十濟)로 명칭을 바꾸고 나중에 백제(百濟)로 개칭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그 중 십제(十濟)라는 나라의 이름을 붙인 이유는 10명의 신하로 시작했다는 뜻이고, 백제(百濟)라는 나라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100명의 신하로 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역사서에는 적혀있습니다.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온조는 한수 남쪽[河南]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BC18년)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19p. 비류왕 17년 기사 중에서

바로 아래의 자료가 그 내용입니다.

십제(十濟)를 세우기 전 온조국(溫祚國)을 세울 때도 이 10명의 신하가 함께 했는데 그 10명이 누구누구인지 찾을 수 있을까?

그 10명의 명단은 이렇습니다.

‘오간(烏干), 마려(馬黎),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흘우의 오기로 보임),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전섭(全攝), 조성(趙成), 범창(范昌)’

이 분들이 바로 십제(十濟) 건국(建國)의 주인공들이죠.

앗! 그런데 10명 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 사람이 있네요. ‘범창(范昌)’

어마나! 이 분이 사용하는 성(姓)이 나주 범(范)씨네?

그렇다면 회룡분지(回龍盆地)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온조국(溫祚國) 자리가 ‘범골’인데, 범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범골’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10명의 신하 중에 범(范)씨가 똬악? 그것도 나주 범(范)씨?

이거 뭐야? 난리 났네. 정말 난리 났네. 에헤라디여. 드디어 찾았구나. 

범(范)씨 집성촌의 시조(始祖)를. 

이 분이 만일 자손이 번성하여 또는 다른 이유로 회룡분지(回龍盆地)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면 당연히 이 동네의 지명이 ‘범골’이 되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범골’ 범(范)씨 집성촌에 살았던 의정부 토박이 나의 어린 시절 그 친구 집안이 혹시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집안이었던 거야? 아이고 친하게 지내놓을 걸. 연락이 끊겨 버렸네. 이런 된장할.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나라 성씨 족보를 아무리 뒤져도 ‘범창(范昌)’ 관련 내용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연구에 길이 막힌 거죠. ‘범창(范昌)’이라는 분이 범(范)와 범(凡)의 시조(始祖) 정도로 나와 줘야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지는데, 아무리 뒤져도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모든 자료에는 범(范)와 범(凡)의 시조(始祖)를 중국에서 벼슬하다 귀화한 사람들로 적어놨더라고요.

이거 참 문제야. 문제...우리나라 부여시절부터 있었을 성(姓)씨를 중국에 가져다 붙이는 거 이거 사대주의야. 사대주의. 안 그렇습니꽈~. 여러분.

아. 또 여기서 막히는 건가요? 

산이 나오면 기어 넘어 가고 바다가 나오면 뗏목 만들어 건너면 되는 거지 별 수 있습니까?

위에 10명의 신하들 중 지금까지 이어져 집안을 이루고 족보에 시조로 기록된 분들이 있습니다. 천안 전씨 집안의 족보인 <전씨대종보>로 이용하여 정리해보았습니다.

①온조(溫祚)

부여 서씨(徐氏)의 시조

②전섭(全聶)

천안 전씨의 시조

③마려(馬黎) 

장흥 마씨의 시조

④을음(乙音)

장흥 고씨의 시조 또는 해씨의 시조로도 불림, 고주몽과 6촌 형제 간으로 해씨로 보기에는 어려움

⑤해루(解婁)

부여 해씨의 시조, 보다 근본적으로는 북부여의 해모수(解慕漱)가 시조, 

백제의 대성팔족(大姓八族)

⑥한세기(漢世奇) 

옥천 한씨의 시조

⑦조성(趙成)

직산 조씨의 시조

여러분 보기 쉽죠? 어디에도 없는 정리, 신동명 박사의 디테일함. 이렇게 자료를 정리하기 위해선 저는 죽는 겁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처럼 물밑에서는 엄청난 물질이 있다는 거.

어? 그런데 오간(烏干), 흘간(屹于), 곽충(郭忠), 범창(范昌) 4명에 대하여는 정리된 내용이 없네요. 네.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없습니다. 샅샅이 다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은 어떻게 된 걸까요?

‘기원전 6년 봄 (음력) 2월’에 죽습니다. 온조국(溫祚國)을 세운지 13년 되는 해에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에는 엄청난 사건이 터집니다. 그리고 이 4명의 신하는 이때 죽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개인들만 죽은 것이 아니라 이 4명의 신하의 집안은 이때 멸절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범창(范昌)이라는 신하가 ‘회룡분지(回龍盆地)’에 ‘하북 위례성(河北慰禮城)’에 살 수 있었던 시간은 13년.

과연 이 정도의 시간으로 범창(范昌)의 집성촌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제 생각은 ‘충분히 가능하다’입니다. 왜냐하면 소서노 여황제(女皇帝)와 비류·온조왕자의 출발은 맨 땅에 헤딩하는 형태가 아니라 이미 ‘패대(浿帶, 패수와 대수지역, 지금의 하북성 난하 부근)’을 접수하고 고주몽으로부터 어하라(於瑕羅: 백제의 임금 호칭)로 인정받은 뒤, 2만 여명의 백성을 데리고 출발을 했기 때문입니다.

비류와 온조가 결별하게 되어 백성을 반으로 나누어 시작했다 하더라도 온조국(溫祚國)에는 1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시작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범창(范昌)의 집성촌 형성은 충분할 수 있습니다.

왜냐? 이 시절의 인구이동 형태는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가 통째로 집성촌을 옮기는 형태를 띄기 때문이죠. 당시 온조국(溫祚國) 1만 명의 인구 중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사람의 수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다 가족이요. 친지였을 테니, ‘범골’에 온조국(溫祚國)이 자리 잡을 때 이미 범(范)씨는 집성(集姓)을 이루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범창(范昌)은 온조대왕을 도와 나라를 이끌다가 어떤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그 사건으로 그 집안이 몰살이 되었고 그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하남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 사람들이 범창(范昌)의 성을 따서 ‘범(范)씨의 동네’, ‘범골’이라 이름 지었을 확률은 매우 높은 것이죠.

아~! 그래서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범골’ 지명 유래 이야기만 나오면 ‘범(范)씨 집성촌’ 이야기가 회자될 수밖에 없었던 거군요.

이로써 ‘범골’이 ‘범(范)씨 집성촌’과 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2,000년 전 온조국(溫祚國)의 역사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는 합리적 의심에 대하여 기술해보았습니다.

이 글을 모두 읽으신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세요.

온조대왕의 사라진 13년의 역사 속에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을 배경으로 번성했을 범창(范昌) 할아버지의 ‘범(范)씨 집성촌’이 마음속에 그려지시나요? 



신동명 교육학 박사

현) 세한대학교 사회복지상담학과 교수

현) 전국지명밟기운동본부 전국대표

저서: 역사소년 신새날, 십대토론, 행복한 수다가 치매를 예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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