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의정부 지명밟기 이야기 시리즈 28 - ‘동명왕(東明王) 사당(祠堂)’을 찾아서.
  • 기사등록 2022-07-19 09:52:45
기사수정

의정부 지명밟기 이야기 시리즈 28 - ‘동명왕(東明王) 사당(祠堂)’을 찾아서.

 

 

“형님, ‘범골’을 정리하다보니 이건 완전히 온조대왕 역사 그 자체더라고요. 오호입성(五虎入城) 사건이라고 있는데요. 이 사건으로 소서노여제가 죽었고 ‘범골’은 소서노의 죽음을 지명으로 남긴 거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봐요.”

“그래? 처음 듣는 이야긴데? 의정부는 백제의 땅이라고 이야기하고 이성산성을 근거로 하는 사람이 있긴 있었는데. 그 양반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나네? 무슨 ‘국’자가 들어가는 이름이었는데...”

“그래요?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이 있었네요.”

“그래. 회룡분지가 이성산성이라면서 이야기를 많이 하던 사람인데 ‘국’ 뭐더라? 경기향토사학이라는 책에 그 사람 글이 올라온 걸로 기억하는데, 동명이 네가 한 번 찾아봐라.”

 

“형님. 그 책 찾았어요. 그 분 이름이 안국승씨네요.”

“그래! 안국승.”

“이 분 글은 제가 이미 가지고는 있었어요. 근데 이렇게 책자로 확인하게 되니 앞으로 제 주장을 펼칠 때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말이야. 저번에 ‘범골’ 이야기를 했잖니. 그 ‘범골’에는 지금도 ‘산치성’을 드리는 행사를 하고 있어.”

“그래요? 그 이야기 좀 자세히 해주세요.”

“그러니까 그게 내가 의정부 문화원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 책으로 냈던 거 같은데, 그 동네 내 친구가 하나 있거든 세무사를 하는 친군데. 그때 구술된 내용을 보면 그 동네는 얼마 전까지 ‘산치성’을 드렸다는 거야.”

순간 신동명 박사의 머리 속에는 번개처럼 지나가는 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온조왕(溫祚王) 원년(B.C 18년) 여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元年 夏 五月 立東明王廟.」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 왕조

‘아! 이거다. 드디어 동명왕 사당이 나타나는구나!’

이렇게 우연을 빙자한 필연을 통해 온조대왕님은 자신의 역사를 후세에게 전하고 있다는 것을 수없이 경험하는 신박사다 보니 허인규(66세. 전 의정부 문화원 사무국장) 형과의 통화 내용은 온조대왕님이 어서 나의 역사를 찾으라는 손짓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근까지 ‘산치성’을 드리다가 김신조 사건 알지? 그 사건으로 공비들이 숨어들 수 있는 건물들은 모두 없앴는데, 그때 이 동네 사당도 철거되고 ‘산치성’도 못 드리게 막았다는 거지. 그래서 최근에 다시 ‘산치성’을 드릴 수 있도록 허락을 해 달라 민원을 제기 했는데 도봉산이 국립공원으로 묶여 있어서 안 된다고 민원이 반려 되었다는 거야.”

“형님. 그럼 사당은 그대로 남아 있을까요?”

“그건 잘 모르지. 그래도 치성을 드리던 곳인데 흔적인 그대로 있는 걸로 아는데...”

“형님 제가 직접 찾아가 보겠습니다. 그 분 좀 소개 시켜주세요.”

“그래. 함 알아보자고.”

통화가 끝나고 시간은 시위를 떠난 화살의 속도로 지나가던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을 뒤지다가 ‘범골’ 마을 이야기가 실린 의정부문화원 발간 ‘회룡문화’ 제9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동명이의 머리에서는 ‘동명왕 사당(祠堂)’을 반드시 찾으라는 온조대왕님의 계시(啓示)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자료의 내용을 빠뜨리지 않고 샅샅이 탐독하게 되었죠. 그러면서 인규형은 ‘산치성’이라 표현하는데 책에서는 ‘산신제’로 표기 되어 있다는 것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는 와중에 전화가 왔습니다.

“석경바위와 범굴 사진 찍으러 갑시다.”

수원 형님의 전화였습니다.

“그럼 언제 갈까요?”

“이번 주 금요일 어때요? 오후 4시쯤.”

“좋습니다. 그럼 어디서 뵐까요?”

“호암사로 올라가야 하니까 의정부 시청 앞에서 3시30분에 만나 차로 호암사까지 올라가는 걸로 합시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때 뵙는 걸로 해요.”

전화를 끊고 호암사 올라가는 길이라니 ‘범골 산치성 터’도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알 수도 없는 길인데 왜 호암사 올라가는 길에 같이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 지는 지금도 해석이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무작정 ‘범골 산치성 터’를 알만 한 사람들에게 카톡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죠. 인규형님 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죠. 20여명에게 문자를 돌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연락은 없었습니다.

마침 그때 인규형님에게 전화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다짜고짜

“형님. 저번에 ‘범골’에 사셨던 세무사 하는 형님 연결 좀 부탁드려요.”

“그래. 통화 하고 전번 줄게.”

그렇게 해서 정윤구 세무사님이 연결되고 최근까지 산치성을 주도했다는 친구 박용구란 분을 소개받습니다.

“네. 연락 받았습니다. 금요일 4시에 그러면 호암사 올라가는 굴레방 다리에서 뵙는 걸로 하죠.”

‘엉? 동명왕 사당도 호암사 가는 길이었던 거야?’

그래서 수원형님이 전화왔을 대 그렇게 불쑥 함께 찾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였나?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속장소에서 두 사람은 함께 박용구란 분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런데 김수원 형님이 느닷없이 질문도 하지 않은 한마디를 하십니다.

“내가 동명왕 사당이 될 만한 자리로 추정되는 곳을 두 군데 알고 있는데 오늘 가는 곳이 거길까 모르겠네. 그리고 ‘사당터’가 되려면 반드시 근처에 샘물이 있어야 합니다. 신박사님.”

그러는 사이 박용구라는 분이 손임옥(63세)이라는 범골 청년회장님과 함께 올라오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관절이 아파서 산을 올라갈 수 없어요. 그래서 청년회장님을 모셔왔어요. 이분 도움을 받으시면 됩니다.”

우리를 보자마자 손임옥(63세)이라는 범골 청년회장님이 이번에는 또 뭐 때문에 왔나 싶으신지 질문부터 던지십니다.

“이 산치성에 대하여 향토문화로 조사한다고 여기저기서 왔는데, 오늘 오신 분들은 어디서 오신 분들인가요?”

“네. 저희는 의정부지명밟기라는 시민 단체에서 왔습니다. 그전에는 조사해서 기록하는 게 목적이라면 저희는 연구가 목적이라고 보시면 돼요. 사라진 역사를 발굴하는 팀이라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아. 그러시구나.”

최종으로 인수받은 손임옥 회장님이 호암사 입구에서 차를 세우라 하더니 왼쪽 계곡으로 내려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길은 사라지고 나뭇가지들로 앞이 안 보이는 언덕을 올라가는데 웜마! 이 분 발걸음이 얼마나 날랜지 휙휙 날라 다니시네? 그걸 쫒아가는 동명이는 호흡이 가쁘고 비처럼 쏟아지는 땀방울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는데, 어서 오라는 소리는 벌써 언덕을 넘어 골짜기를 넘어 다른 언덕에 서계시네.

“길이 싹없어졌네요. 한동안 안했더니. 사실 3년 전까지 의정부시 모르게 했었는데, 소가 비싸다보니 한 100명이 넘게 돈을 거둬야 하는데 제가 그걸 7년 동안 했거든요. 어릴 때 고등학생 때 참여하고 커서는 마을 회장을 하면서 7년 동안 제가 그걸 했는데. 이제는 동네에 사람이 없어서 못 해요. 소 한 마리에 7백 만 원이나 하니 감당할 수가 없는 거죠.”

“그러셨구나.”

“우리 마을은 이게 굉장히 중요한 행사에요. 1년에 두 번씩 할 정도로 중요하죠. 우리 동네 사람들은 믿음이 하나 있어요.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지만 비근한 예로 월남전에 가서 다른 동네 사람들은 많이 죽었잖아요. 그런데 우리 동네는 아무도 안 죽고 모두 돌아왔어요. 그리고 이 제사를 지내서 그런지 마을 사람들이 큰 화가 없고 마을이 평온하게 넘어가니까 지금도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간 사람들도 제사 지내면 돈도 내고 참여도 하겠다는데 너무 힘들어서.” 

“그러게요. 계속하면 좋은데.”

“우리 마을 사람들은 그래서 동네에 대한 자부심도 매우 높거든요. 이 도로가 ‘신흥로’로 바뀌었을 때 ‘범골로’가 훨씬 오래된 지명이고 우리에게는 소중한 지명이니 ‘범골로’로 바꿔 달라 해서 지금의 ‘범골로’로 수정 된 거예요.”

“대단하시다.”

“이 ‘산치성’도 공비 김신조는 여기로 넘어오지도 않았는데 불똥 튀어서 사당도 없어지게 되고 ‘산치성’도 못 하게 하고, 그래서 저희가 의정부시에 건의를 해서 이제는 공비도 없고 하니 산치성을 다시 올릴 수 있게 하게 해 달라 했더니 국립공원 핑계만 대고. 그래서 몰래 3년 전까지 한 거예요. 이제는 이 산치성이 없어지겠죠. 이 소 한 마리를 지게에 매고 여기를 올라 온다 생각해보세요. 거기에 물, 떡. 이런 거 까지 지게에 실어오려면 장정이 줄 잡아 몇 십 명은 있어야 하거든요. 근데 요즘 아이들이 누가 하겠어요. 그리고 하는 방법도 아이들은 모르고. 없어진다고 봐야죠.”

“안타깝네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함께 한 세 사람은 발걸음은 어느 네모난 제단 앞에 서있었습니다.

“여기에요. 여기에 사당이 있었고 내가 어릴 때에는 사당 안에 그림도 있었죠. 호랑이 그림, 산신령 그림, 여자 무당 그림 같은 거.”

“그럼 사당이 있었네요?”

“그럼요. 이 제단이 사당 안에 있었던 거죠. 그리고 ‘산치성’을 지내는 소는 거세를 안 한 소여야 해요.”

“거세를 안해야 한다고요?”

“그럼요. 거세한 소는 하늘에 바칠 수가 없어요. 남성이 살아있는 거 그대로를 올려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소부랄, 머리, 귀 등등을 모아서 소 전체를 하나로 만들어 하늘에 바치죠. 그리고 나머지 고기는 동네 사람들이 나누어 먹고요. 한 해에 두 번 하니까 다른 동네 아이들이 소고기 먹으러 우리 동네로 이사 오고 싶다고 하기도 했어요.”

“부러움의 대상이었겠네요.” 

“예나 지금이나 소를 어디 함부로 먹을 수 있나요? 비싸고 신성하고. 범골 산치성은 음력 2 월 초하루와 10월에 호암사(虎岩寺) 주지스님으로부터 기일을 받아와서 제를 지내죠. 또한 제를 지낼 제주(察主)와 화주(化主)는 부정한 행동을 하면 안돼요. 부부관계도 ‘산치성’ 기간에는 할 수 없지요. 누가 ‘산치성’ 기간에 죽으면 ‘산치성’을 할 수 없었어요. 날짜를 다시 받아야 했지요. 그렇게 까다로운 ‘산치성’이에요.”

“굉장히 신성시 했네요.”

“그런데 왜 이 ‘산치성’을 찾으신 건가요?”

“이 산치성은 온조대왕과 관련된 ‘산치성’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온조대왕이 회룡분지 범골에 온조국(溫祚國)을 건국하면서 그 해에 ‘동명왕 사당’을 세우는데 우리가 볼 때는 그 곳이라는 거죠.”

“아닌데. 그런 소린 들은 적이 없어요. 이 산치성은 호랑이 때문에 하는 건데? 그래서 산치성이 끝나면 고기들을 나무 위에 매달아 놓고 내려가요. 그러면 호랑이들이 마을에 내려오지 않고 사람들 보호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산치성은 밤에 지내요. 낮에 안 지내고.”

“그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고요. 2,000년 전의 일이요, 온조국(溫祚國)이 이곳에 13년 간 있다가 하남으로 내려갔으니 그 이야기가 변형이 되거나 끊어졌다가, 그 중 누군가 제를 지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다시 복원하여 내려올 수도 있고 그래서 이름도 산치성, 산신제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전해질 수도 있는 거고. 모든 가능성은 열어놓고 보자는 거예요.”

“아무튼 온조대왕 이야기는 처음이라.”

“그러실 거예요.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고. 저도 마찬가지고. 이제 다시 복원하느라 연구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저 나무는 무슨 종류인가요. 굉장히 오래 된 거 같은데.”

 

“그건 참나무요. 신박사님. 한 400년은 되어 보이는데. 그러면 여기서 ‘석경바위’가 보이나요?”

“그건 본 적이 없어요.”

“나무가 너무 우거져서요?”

“아니요. 산치성은 밤에 드리기 때문에 ‘석경바위’를 본 적이 없는데요. 저는.”

“신박사님. 이곳에서 보면 ‘석경바위’가 일직선에 서 있어요. 지금 저희가 ‘석경바위’로 갈 건데 어느 쪽으로 가면 빠른 가요.”

“이 골짜기로 가시면 빠릅니다.”

“와! 이 바위 좀 봐요. 이것도 무슨 전설이 있겠는데요?”

“아. 그 바위 밑에 샘물이 있었어요.”

그 순간 출발하기 전 수원형님이 하셨던 ‘사당이 세워지려면 근처에 샘물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전혀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이렇게 맞아 떨어지다니.

“오늘 저희들 때문에 깊은 산속까지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온조대왕님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지만 바라시는 일이 꼭 됐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우리 동네도 유명해지고 다 좋은 일 아니겠어요?”

“넵. 글 정리 되는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신동명박사가 이곳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동명왕(북부여 제5대 고두막한, 구구려 동명성왕이 아님.) 사당(祠堂)’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청동기 시대 이후 땅의 쓰임은 별로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의정부 교도소 자리는 과거에 죄인들을 수용했던 옥장(獄杖)터 자리였고, 의정부 가능동 미군군사기지 캠프 레드크라우드 자리는 조선 효종 때 당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군사훈련을 했던 ‘어립개’라는 자리였던 것을 보면 유추 할 수 있는 부분이죠. 특히 사당 자리 같은 경우는 신성시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근처에 샘물이 나와야 하는 등의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자리가 정해지면 절대불변인 겁니다.

둘째 ‘산치성’, ‘산신제’등의 이름으로 변하여 전해져 오고 있지만 제사와 관련한 독특하고 유일한 문화가 범골 그 자체에서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 때문입니다. 긴 연속성은 그 만큼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일 거라는 거죠.

稱爲檀君八加, 乃殺白牛, 以祭天于太白之麓.

이를 일컬어 '단군팔가(檀君八加)'라 하고는 흰 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紀)’-북애노인(北崖老人)=북애자(北崖子)

셋째 그 규모에 있어 다른 산신제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보통은 돼지를 잡을 수도 있는 건데, 돈을 모으기 어려우면 돼지로 바꿀 수도 있는 건데, 이 산치성은 소를 고집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1년에 두 번씩이나. 백제 시대 조상신(祖上神)을 모시는 제를 지낼 때 소를 잡아 올렸다는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죠. 

온조국(溫祚國) 시대의 농업경제 상황을 보면 소를 잡는다는 것은 왕의 행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넷째 이 제사(祭祀)가 가지는 시간대입니다. 독특하게 한 밤 중에 한다는 거죠. ‘동명왕’제사(祭祀)는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입니다. 즉 조상이 혼백이 찾아올 수 있는 시간대에 해야 하는 제사인 거죠. 범골의 산치성이 밤에 치뤄졌던 이유는 조상신 모시는 행사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다섯째 거세하지 않은 소를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거세하지 않은 소는 신성한 생명체를 의미하며, 남성을 의미하고, 군왕(君王)을 의미하죠. ‘북부여 구국의 영웅 제5대 왕 고두막한(동명왕)’을 기리는 사당에 당연히 군왕을 의미하는 거세하지 않은 신성한 소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행위가 아닐까요.

 

신동명 교육학 박사

현) 세한대학교 사회복지상담학과 교수

현) 전국지명밟기운동본부 대표

저서: 역사소년 신새날, 십대토론, 행복한 수다가 치매를 예방한다.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22-07-19 09:52:45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유니세프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