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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지명밟기 이야기 시리즈 29 - ‘모수국’, 소도(蘇塗)가 되다.

 

미추홀에 진출한 비류대왕은 

마한의 54개 국 중 하나인 인천과 부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이라고도 함)’을 복속 시키고 비류국(沸流國)을 세웁니다.

그러면 의정부 회룡분지에 진출한 온조대왕은 마한의 54개 국 중 어떤 나라를 복속 시키고 온조국(溫祚國)을 세울까요?

그건 바로 ‘모수국(牟水國)’입니다.

온조대왕은 회룡분지에 도읍지인 하북위례성을 건설하고 온조국(溫祚國)을 세운 후 낙양동(자일동 포함)에 자리한 ‘모수국(牟水國)’을 복속시키죠. 

수원시(水原市)에서는 모수국(牟水國)이 자기네 고을의 역사라고 자꾸 우기시는데 그러면 앙~돼요. 광개토대왕비에 나오는 마한 54개 국 중 ‘모수국(牟水國)’의 어원은 ‘물’과 관련된 것이고, 수원시(水原市)의 옛 지명이 ‘매홀군(買忽郡)’이며, 그래서 시 이름도 ‘물의 근원’이라는 이름이니까 당연히 수원시(水原市)가 ‘모수국(牟水國)’이라는 주장은 너무나도 비논리적인 주장인 거죠. 왜냐? ‘물’과 연관된 동네는 거기뿐만이 아니라 인천 매소현(買召縣)도 그렇고 의정부 ‘매성현(買省縣)’도 다 물과 관련된 지명이기 때문입니다.

수원시(水原市)가 진짜 ‘모수국(牟水國)’이라 인정받으려면 아래의 글에서 보듯이 3가지가 즉, ①임진강이나 한강을 이용할 수 있는 위치여야 하고 ②갈립산이 있어야 하며 ③옥이 출토되어야 하는 조건을 충족시킬 때 비로소 ‘모수국(牟水國)’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건데? 아무 것도 제시하지 못 하면서 그렇게 강력히 주장하시면 화나죠. 문화선점(文化先占)때문이라는 건 알겠습니다만 아닌 걸 너무 우기면 문화선점이 아니라 문화 침범(文化侵犯)이죵.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 한조(韓條)에는 삼한에 대한 소개와 함께 마한의 소국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마한 54개국은 현재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에 분포하였으며, 모수국은 이 중 하나이다. 모수국은 임진강과 한강을 이용하고, 갈립산에서 출토되는 옥을 무역하면서 세력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과 디지털 양주 문화대전, 신증동국여지승람

일설하고 의정부는 이 3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중랑천을 통해 한강을 이용할 수 있고, 빡빡산이라 불리는 갈립산이 있고, 세종대왕의 옥대에 사용된 푸른 청옥(靑玉)이 갈립산 마지막 줄기 오리골 옥재 동굴에서 채취되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모수국(牟水國)’은 의정부시가 맞습니까? 수원시가 맞습니까?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져 있는 세 글자. ‘모수국(牟水國)’

‘모수국(牟水國)’이 의정부라니 대박. 어쩌면 좋아.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여러분! 의정부에 사는 여러분! ‘의정부 지명밟기 이야기 시리즈’를 사랑해주시는 여러분. ‘모수국(牟水國)’과 관련하여 제가 제안 하나 할게요.

에스토니아에는 '세토왕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답니다. 지금은 사라진 ‘왕국’이죠.

‘세토’는 에스토니아 남동부와 러시아 페초리(Pechory)지역에 사는 소수민족인데요.

그들은 평소에는 전 세계에 흩어져 살다가 매년 8월이면 '세토'에 모여 '세토왕국의 날' 축제를 연다네요.

전통 의상을 차려 입고 전설 속의 왕 '페코'를 대신할 '왕의 대리인'을 선출하고, 고대 폴리포니 전통인 ‘렐로(leelo: 세토의 전통 멜로디, 우리나라 선소리 형태)’를 노래하며 축제를 즐긴다는 거죠.

이 모습이 너무도 감명 깊은 인상을 주는지라 전 세계의 사람들은 이 축제를 보기위해 에스토니아 '세토왕국'으로 속속 들어온다는 겁니다.

어떠세요. 제 제안이? 전 세계의 사람들이 청동기 시대 마한의 ‘모수국(牟水國)’ 축제를 보기 위해 의정부로 몰려온다는 꿈. 의정부시 어떤 위정자의 주장이 아니라 의정부 시민이 나서서 이제는 현실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다시 본 내용으로 돌아와서, 당시 ‘모수국(牟水國)’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 번 그려볼까요?

모수국의 지위 체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나라마다 수령이 있는데, 큰 수령은 스스로를 신지(臣智․신치)라 부르고, 그 다음 수령은 스스로 읍차(邑借:일치)라 부른다.]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 報安邪踧(축) 支濆臣離 兒不例 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신지(臣智), 그 다음 관직을 읍차(邑借)라고 하고 나머지 관직들은 위솔선 읍군(魏率善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라고 한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한(韓)조

그러면 ‘모수국(牟水國)’의 생활상은 어떠했을까요?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그곳 백성들은 정착 생활을 하며, 농사를 짓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기르고 베를 짤 줄 안다.]

其俗好衣幘

[옷과 두건(책幘)을 차려입기를 좋아한다.]

居處作草屋土室 形如冡 其戶在上 擧家共在中 無長幼男女之別

[집을 풀로 지붕을 덮고 흙으로 방을 만드는데 그 모양은 무덤과 같고, 문은 위쪽으로 나있다. 온 가족이 그 안에 함께 지내며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다.]

其葬有槨無棺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 以瓔(영)珠爲財寶 或以懸頸垂耳 不以金銀繡爲珍 其人性彊勇 魁頭露紒(계) 如炅(경)兵 衣布袍 足履革 蹻蹋

[죽은 자를 매장할 때에는 겉 널은 있으나 속 널은 없다.(즉 관을 하나만 쓴다) 소나 말을 탈줄 모르며, 소나 말은 모두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즉, 순장殉葬하는 데) 쓴다. 주옥(珠玉: 옥으로 만들어진 구슬 목걸이)을 귀한 재물이나 보물로 여기는데, 혹은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혹은 목걸이나 귀걸이로 쓴다. 금‧은‧자주비단 등은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람들의 성격은 강인하고 용감하다. 상투를 틀고 모자를 쓰지 않아 상투의 뾰족한 모양이 마치 날카로운 창끝과 같다. 겉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羣取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昻 手足相應 節奏類似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之

[해마다 5월에 파종을 마치고 나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함께 모여서 밤낮 쉬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고 술을 마신다. 그 춤추는 모습은 수십 명이 다 같이 일어나서 서로 따르며 음악에 맞추어 땅을 차듯이 밟으며 허리를 숙였다 폈다하면서 손발을 흔들며 춤을 춘다. 그 춤사위의 절주節奏는 중국의 鐸舞(탁무: 중국 사람이 추는 무도의 이름) 와 비슷하다. 10월에 농사를 모두 끝내고 나서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다음은 ‘모수국(牟水國)’의 특산물을 살펴볼까요?

出大栗 大如梨 又出細尾雞 其尾皆長五尺餘 

[큰 밤(大栗)이 나는데 그 크기가 배(梨)만 하다. 또 가는 꼬리를 가진 닭이 나는데, 그 꼬리의 길이가 무려 다섯 자 남짓이나 된다.]

의정부의 ‘모수국(牟水國)’은 위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위의 내용에 우리 눈을 확 하고 사로잡는 내용이 있네요.

以瓔(영)珠爲財寶 或以懸頸垂耳 不以金銀繡爲珍

[주옥(珠玉: 옥으로 만들어진 구슬 목걸이)을 귀한 재물이나 보물로 여기는데, 혹은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혹은 목걸이나 귀걸이로 쓴다. 금‧은‧자주비단 등은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엉? 금‧은‧자주비단 보다 옥을 더 사랑했다고? 옥이 더 귀한 보물이었다고?

그렇습니다. 마한 시대에 발견되는 유물들에는 구슬, 옥 등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청옥을 특히 비싸게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잠깐! 여기서 질문.

의정부 낙양동 오리골 옥재 동굴에서 ‘청옥(靑玉)’이 채취되어 중국과 직접 무역을 하여 부(富)를 축적하는 ‘모수국(牟水國)’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이 온조대왕이다라면 이거 포기 하시겠습니까?

이리하여 비류대왕에게 복속된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과 온조대왕에게 복속된 ‘모수국(牟水國)’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두 몰살 되었거나 노예가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도(蘇塗)가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성한 땅, 소도(蘇塗).

도둑이 도망가도 잡으러 들어 갈 수 없다는 금역의 땅, 소도(蘇塗).

하늘에 제사를 주관하는 천군(天君)이 다스렸다는 신성한 땅.

소도(蘇塗)가 되었던 겁니다.

사실 소도(蘇塗)는 청동기 부족과 철기 부족의 정치적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는 역사적 산물이죠. 즉, 청동기를 병기로 사용하던 국가에 철기를 사용하는 북방민족이 내려와 복속 시키는 과정 속에서 기존의 권력자를 적당히 대우하면서 그 나라 백성들을 흡수하는 과정의 특별 조치가 소도(蘇塗)의 발생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철기를 다루는 온조국(溫祚國)이 들어오면서 청동기를 다루는 ‘모수국(牟水國)’은 마침내 온조국(溫祚國)의 소도(蘇塗)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로 정리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소도(蘇塗) ‘모수국(牟水國)’은 어디였을까?

의정부시 자일동 41-6번지 귀락마을과 오리골입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은 ‘의정부 지명밟기 이야기 시리즈 15– 모수국의 소도(蘇塗) ‘오리골’’을 참고하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신동명 박사는 왜 이곳을 소도(蘇塗) ‘모수국(牟水國)’이라는 지목하는 것일까?

무슨 이유로 그런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일까?

사실 우리 의정부 지명밟기 진등친목회 회원(김수원(72), 강대성(61), 정일삼(60), 신동명(60))등은 2022년 6월1일(전국지방선거일) 오후 2시에 의정부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그 많던 고인돌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현재 남아 있는 고인돌의 흔적들을 눈으로 기억하고 사진으로 남기기 위해 의정부시 자일동 41-6번지 귀락마을 ‘고인돌 군락지’를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귀락(歸樂) 마을’ 안으로 쭉 들어오면 논길이 펼쳐져 있는데 그곳에 도착한 우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도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거에 한 번 놀라고요. 고인돌 군락지 정도를 넘어서 고인돌 제조 공장이라는 사실에 두 번 놀랐습니다. 논 가운데에 고인돌들이 마구 흩어져 있는 데 의정부시에서는 그냥 방치하고 있었다는 사실, 아무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넘어 분노로까지 연결됐죠.

그리고 논 안에 있는 돌 뿐만이 아니라 논 옆에 조성되어 있는 개천의 돌조차도 고대 선조들의 손때가 묻은 고인돌 파편들이라는 사실은 인터넷이나 경기문화재 소개 자료에는 없는 새로운 발견이었죠.

하물며 탐방을 끝내고 나오면서 마주친 길 위에 놓인 돌마저 ‘신석기 유물-갈판’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신석기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갈돌’과 ‘갈판’

귀락마을에 널부러져 있는 신석기 유물 ‘갈판’의 부분석

그날 논 안에 있는 거대한 검은 고인돌을 보면서 우리는 이 고인돌 덕에 이 동네 이름이 지금의 귀락(歸樂)이 아니라, 거북이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귀락(龜落)마을이었겠구나 하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개천의 돌을 살피며 산의 암벽을 끼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거북이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귀락(龜落)마을의 거대한 검은 

고인돌 덮개석 

어머나! 그 중에는 뗀석기도 있더라고요. 아까운 건 연천처럼 완전한 주먹도끼여야 하는데. 흑 ㅠㅠ. 개천의 암벽을 보면서 ‘아. 이래서 여기가 고인돌 공장이 됐겠구나.’ 뭐 이런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며 걸어 내려가고 있었죠. 

그런데 매의 눈 김수원 형님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건 뭐야? 뭔가 오늘 하나 걸렸네. 딱 걸렸어!”

다들 고개를 들어 개천 위를 보니 사유지 표시로 쳐있는 철조망 너머 마당에 검은 뭔가가 서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야. 고인돌을 찾았다. 선 채 그대로 고대의 고인돌이 남아 있었네.”

그러면서 가까이 접근해보니 그것은 ‘고인돌’이 아니라 ‘선돌’이었습니다.

개인 사유지에 아직까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선돌’이 떡 하니 우리를 반기고 있었던 겁니다. 마치 ‘너희는 왜? 이제사 찾아오냐.’며 책망을 하는듯한 모습으로 말입니다.

의정부시 자일동 41-6번지 귀락마을에서 발견된 선돌(문화재로 지정 되지 않은)을 찾아낸 의정부 지명밟기 진등친목회 회원들(김수원, 강대성, 정일삼)

“어? 근데 요즘 거 아냐?”
“그러게. 돌이 너무 깨끗하고 하단부가 그라인드로 갈아낸 것처럼 마감처리가 저렇게 잘 되어 있을 수가 있는 건가?”

앞면은 평면이고 뒷면은 삼각형으로 각을 살린 잘생긴 선돌.

하단부는 일부러 빗각으로 자르고 굳이 그 선돌이 움직이지 않도록 받침돌을 두 개 받쳐놓은 인간의 작품일 수밖에 없는 깔끔한 모양의 선돌.

“근데 그 오랜 시간을 어떻게 이 두 개의 받침돌로 버텨온 거지? 각이 정말 죽인다.”

고인돌을 그대로 닮은 선돌이 발견되자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진등친목회 회원들.

“이 돌은 고대 시대 선돌이 맞아요. 너무 보존이 잘 되어 있고 균형이 너무 잘 맞아 있으니까 요즘에 세운 건가 하는데 이건 고대 선돌이 맞습니다. 신박사님. 이 선돌이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나요? 없나요?”

“없습니다.”

“그럼 빨리 이 선돌을 문화재 등록부터 합시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긴 사유지라.”

“문화재는 사유지고 뭐고가 필요없는 거예요. 바로 추진해야지 안 그러면 엉뚱한 사람이 자기네가 발견했다고 낚아채갑니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속에서 신동명 박사의 검색엔진은 복잡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신성한 장소를 표시하는 ‘선돌’ 이 발견이 되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소도(蘇塗) ‘모수국(牟水國)’이었는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으니까요.

마침내 내린 결론은 오리골과 귀락마을 두 마을을 합쳐서 소도(蘇塗) ‘모수국(牟水國)’이었다는 것. 그리고 ‘선돌’의 위치 덕에 두 마을이 어떻게 하나로 이어져 있었는지 선명하게 파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 선돌을 보고 소도(蘇塗)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냐고요?

선돌은 그 출발이 솟대입니다. 솟대가 뭔지 아시죠? 

우리가 시골길 가다보면 장승도 보게 되고 오리같이 생긴 새를 꼭대기에 매달아놓은 긴 장대가 서있는 모습을 보기도 할 거예요. 요즘엔 공원에도 세워져 있어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이 장대가 바로 솟대입니다. 지역에 따라 '당산', '별신대', '짐대', '진대', '용대', '수살대', '추악대', '당산할머니', '진떼백이 서낭님', '거릿대 장군님', '대장군 영감님' 등으로 불리기도 하죠.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懸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이들은 귀신을 섬긴다. 각 부락마다 한 사람을 선출해서 천신에게 제사지내는 일을 주관하게 하는데, 이 사람을 천군天君이라 한다. 또 모든 소국들 마다 각기 별도의 작은 마을(別邑)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를 소도(蘇塗)라고 한다. 소도(蘇塗) 가운데다 큰 나무를 세우고 그 위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서 귀신을 섬긴다. 그곳으로 도망 오는 자가 있으면 (그가 무슨 이유로 도망 왔던 간에) 모두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도둑질하기를 꺼리하지 않는다. 본래 소도를 세운 목적과 비슷하지만, 결과적으로 사찰은 善을 행하도록 권장하고 소도는 惡을 행하도록 조장하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한(韓)조

소도(蘇塗) 가운데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는 큰 나무가 솟대인 겁니다. 이러한 풍습이 전해지고 전해져서 그 솟대의 ‘선돌’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신성한 장소 ‘소도(蘇塗)’에 ‘선돌’이 서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요. 그곳이 곧 ‘소도(蘇塗)’이요. 두 마을을 이어주는 길목에 ‘선돌’이 서있으니 오리골과 귀락마을 두 마을을 합쳐 소도(蘇塗) ‘모수국(牟水國)’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요. 

‘선돌’은 솟대(오벨리스크: Obelisk, 점점 가늘어지는 피라미드 모양의 꼭대기를 지닌 기념 건조물이다. 고대 방첨탑은 한 덩어리의 암석으로 만들어졌다.)역할로 신성한 장소를 표시하는 것이다. 

 

한문화타임즈 [k- route를 가다] “고인돌 루트(dolmen Route)”의 실체 16회, 2020.05.23. 

 이매림 (사) 대한사랑 수석본부장 /미래로 가는 바른역사협의회 사무총장)

논리가 조금 모자라는 것 같다고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오리골과 귀락마을’이 왜 어원적으로 소도(蘇塗)일 수밖에 없는지!

지금부터 신박신박 신박사의 마무리 해체쑈를 시작하겠습니다. 기대하시라. 마무의리 해체쑈~쑈~쑈.

‘소도(蘇塗)’는 순우리말로 ‘솟터’입니다.

‘솟터’는 다음과 같은 6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① [소(牛)의 터]이거나 [새(鳥)의 터]일 것 ② [솥(鼎) 터]여야 할 것 ③ [솟은 터], 즉 언덕이나 고원이어야 할 것 ④ [못(澤), 연(淵), 호(湖), 택(澤), 소(沼), 정(井), 천(泉)) 터]여야 할 것 ⑤ [좇(祖) 터], 즉 조상의 땅이어야 할 것 ⑥ [좇]의 여성형인 [젖]과 관계되는 [젖터]여야 할 것 등이 그것입니다.

‘오리골과 귀락마을’엔 이 여섯 가지와 관련된 장소나 지명이 남아 있을까요?

① [소(牛)의 터]이거나 [새(鳥)의 터]일 것은 ‘봉황의 계곡’이라는 뜻을 가진 부계(鳧溪) 표석에서 가볍게 정리가 되는군요.

8. 오리골: 오리골은 원래는 옥재에서 이 곳까지 5리(里)가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곳에 낙곡(樂谷) 진익한(陣翼漢, 1677~1738)이 부계라는 표석을 세워놓아서 오리(鳧)골이 되었다고 한다.

9. 부계(鳧溪) 표석: 부계표석은 낙곡 진익한이 세워 놓은 표석으로, 오리(五里)골이 오리(鳧)골이 된 원인이 되었다.

의정부 지명유래 낙양동(현재는 송산3동)편 159p

15. 가마소

가마소는 부연곡(釜淵谷)이라고도 하며, 장마에 유실되어 지금은 없어졌다.

의정부 지명유래 161p

② [솥(鼎) 터]여야 한다는 조건은 ‘가마솥, 가마 부(釜)’와 ‘연못 연(淵)’이 합쳐져서 가마솥 같이 생긴 연못, 가마소(부연곡(釜淵谷))이 쉽게 해결해주네요.

③ [솟은 터], 즉 언덕이나 고원이어야 한다는 조건은 ‘옥재’라는 이름에서 어려움 없이 해결되어 버렸습니다. 재는 언덕을 나타내는 단어니까요.

18. 옥(玉)재

옥재는 포천과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옥이 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의정부 지명유래 162p

④ [못(澤), 연(淵), 호(湖), 택(澤), 소(沼), 정(井), 천(泉)) 터]여야 한다는 조건은 이미 ②번에서 함께 설명이 되어 있으니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거 같습니다.

⑤ [좇(祖) 터], 즉 조상의 땅이어야 한다는 조건은 ‘남근봉(男根峰)과 여근곡(女根谷)’이라는 지명이 일사천리(一瀉千里)로 해결해주고도 남네요.

14. 남근봉(男根峰)과 여근곡(女根谷)

도둑골의 오른쪽에 있는 봉우리가 남근봉이고, 위 쪽에 있는 골짜기가 여근곡이다.

의정부 지명유래 낙양동(현재는 송산3동)편 160p

⑥ [좇]의 여성형인 [젖]과 관계되는 [젖터]여야 한다는 마지막 조건은 찬우물(冷泉)이라는 지명이 군더더기 없이 해결해버립니다 그려. 물이 너무 좋아 ‘젖물’이라 불렸다는 내용에서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64. 찬우물(冷泉)

찬우물은 행상바위에서 100m 정도 지점의 계곡에 있으며, 물이 차고 주위의 경관이 좋아 민락동 사람들이 예전부터 신성시했다고 한다. 이 물을 마시면 부스럼이 낫는다는 얘기도 전해오며, 물이 너무 좋아서 ‘젖물’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곤한 낙곡 진익한의 시가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冷 泉(냉 천)

 

옥령지남유냉천(玉嶺之南有冷泉) 옥령 남쪽에 물이 찬 샘이 있는데

촌인목욕백병전(村人沐浴百病 ) 동네사람들은 이물에 목욕하고 모든 부스럼병 나았네

아래추일세쌍안(我來秋日洗雙眼) 가을 햇살이 쪼이던 날 내 이 물로 두 눈을 씻으니

신골상연혼욕선(神骨爽然渾欲仙) 정신과 뼛골이 시원하기 신선이 된 것 같네

(樂谷 陣翼漢)

의정부 지명유래 민락동 153p

“옥재 동굴 앞에는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젖물’ 찬우물이야. 그래서 이 골짜기는 무논이었고 다랑논이었어.”

“우리 어릴 때는 무지개가 옥재 ‘찬우물’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어. 얼마나 예쁘게 옥재에서부터 무지개가 피어오르는지 몰라”

오리골 토박이 홍대연 어르신(80) 부부

여기에 몇 가지 조건을 더 붙이면 물가에 가까워야 하고, 깃대와 관련한 지명이 있으면 더욱

확실하죠. 거기에 지형이 솥을 뒤집어놓은 땅의 모습 즉, 영혼을 상징하는 사람의 정수리와 같이 가마무늬처럼 원구(圓丘, 圓壇)을 이루고 있으면 빼박 소도(蘇塗)인 겁니다.

오리골을 가보시면 가마소에서부터 물길이 시작되어 삼태골을 지나는 낙양물사랑공원 앞에서 수락산에서부터 흘러오는 물을 만나 부용천이라는 이름을 얻고 마침내 의정부 중랑천을 거쳐 한강에 이르는 물줄기가 있으며, 

11. 꽃봉

꽃봉은 귀락에서 광릉 쪽으로 보이는 봉우리로 꽃같이 예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꽃봉을 넘어가면 무지랭이와 새능안이 있다.

의정부 지명유래 자일동 178p

솟대를 꽂은 봉우리로 추정되는 작은 산이 있습니다. 정말 빼박 소도(蘇塗)인 거죠. 

마지막으로 오리골과 귀락마을을 함께 묶으면 솥을 뒤집어놓은 땅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렇습니다. 딱 솥을 뒤집어놓은 둥그런 원 안에 두 개의 마을이 함께 고여 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의심의 눈초리가 뒤통수를 때리니 네이버의 위성사진을 통해 증명합니다.

자! 이 정도면 ‘오리골과 귀락마을’을 합쳐 소도(蘇塗) ‘모수국(牟水國)’이라는 저의 주장은 충분한 논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영혼을 상징하는 사람의 정수리와 같이 가마무늬처럼 원구(圓丘, 圓壇)를 이루고 있는 

‘오리골’과 ‘귀락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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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7-19 10: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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