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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를 다시 품다 – 4. 제2의 의순공주(義順公主) 사건 ‘양공주’

 

 

내가 그날 그 골목에 들어섰던 때는 중3 시절이었습니다.

어스름한 저녁 빛이 깔린 골목에 들어설 즈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둥그렇게 모여 웅성웅성 대는 모습을 발견했죠. 무슨 일인가 보니 ‘양공주’ 누나의 머리에 피가 터져 철철 흐르는데, 머리채를 움켜잡은 미군 흑인 병사 놈은 누나를 계속 때리는 중이었습니다. 이런 난리굿을 치는데 아무도 말리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가만히 보니 그 누나는 미군부대 PX에서 사온 물건을 저녁이면 우리 집에 팔러오는 낯익은 누나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리를 높게 들어 양키의 허벅지를 발꿈치로 냅다 찍었고 간신히 누나의 퇴로를 만들어 줄 수 있었죠. 

“누나. 어서 빨리 도망가세요.”

그때서야 사람들은 

“병원.”

“앰블란스.”를 외쳐댔습니다.

허벅지를 붙들고 일어선 양키는 겁에 질려 “쏘리, 쏘리”를 외쳤고 상황을 종료 시킨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죠.

“동명이 네가 왜 나서?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럼. 누나들이 맞는 데 가만있어요?”

“쟤네들이 무슨 인간이냐? 저것들 맞아도 싼 년들이야.”

“아줌마. 그게 뭔 말이에요? 저 누나들 불쌍하지도 않아요?”

“저 년들이 뭐가 불쌍해? 지 년들이 선택한 일인데.”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날리는 아줌마의 말은 나를 그 자리에서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동명이 네가 그런다고 일이 해결될 줄 아니? 저 아이 오늘 네가 그런 것 때문에 집에 들어가서 더 심하게 맞을 거다.”

 

당시 60~70년대 의정부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한 집 걸러 한 집에 ‘양색시, 양공주’가 살았고 한 집 걸러 한 집에 ‘양키물건 장사’가 사는 마을.

새벽이면 미군부대 탱크와 장갑차가 아스팔트를 달리며 내는 “그르르륵” 소리에 깨어나고 저녁 11시면 미군부대에서 불어주는 “빠~빠~밤” 취침 나팔소리에 잠이 드는 동네. 

술에 취한 양키들이 지르는 고함소리와 미군병사 놈들에게 매 맞는 누나들의 비명소리가 뒤섞인 무질서와 폭력의 도시.

그리고 그 속에서도 미묘하게 작용하는 계급적 의식과 무섭도록 침묵하는 대한민국의 민낯.

90년대까지 의정부는 미국 안에 한국이 있는 형태였습니다. 동서남북 모든 곳에 미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었고 시내 중심에도 미군부대가 자리하고 있었죠. 

지금 되돌아보면 의정부 중심에 자리 잡은 미군 헬기장에 의해 의정부의 도로가 기형적이었던 것만큼 의정부는 매우 많은 것들이 기형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미군부대가 없다면 직선으로 3분에서 5분 걸릴 거리를 미군부대 때문에 빙 돌아서 20분, 30분 소비되는데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이상했고, 양키 놈들한테 빌붙어 산다고 ‘양공주’ 누나들한테는 손가락질 하면서 정작 본인들은 양키물건 장사로 생활한다는 것도 이상했고, 가족 중에 미군부대에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집안은 무슨 벼슬을 한 것처럼 어깨에 힘주고 다니고 주변 사람들은 부러운 눈빛으로 가깝게 지내려고 알랑방구를 끼는 것도 이상했더랬습니다.

아~! 나의 소중한 정체성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는 기형적 조건이 너무 많았던 의정부네요.

당시 ‘양색시 동네’로 유명했던 의정부 지역은 ‘가능동’과 ‘민락동 뺏벌’이었습니다.

가능동 캠프 레드크라우드 앞과 민락동 뺏벌 캠프 스탠리 옆의 밤은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었죠. 저녁이면 반짝이는 불빛 때문에 1년 내내 크리스마스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는 이 동네에서 우리 누이들은 갖은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보호받지 못했던 그 누이들을 향해 우리는 ‘양색시, 양공주’라는 말을 만들어 손가락질을 했댔던 거죠.

세상의 멸시와 빈정을 모두 감내해야 했던 누이들은 의정부 기지촌에 대하여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의정부 민락동 뺏벌과 관련한 지명 풀이에 당시 누이들의 생각이 녹아있어 소개해봅니다.

의정부 민락동 뺏벌 캠프 스탠리 후문에 최근에 문 닫은 ‘캔터키 후라이드’ 치킨집

뺏벌: 뺏벌의 지명 유래는 크게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배나무 받이 많았기 때문에 ‘배밭’이 ‘뺏벌’이 되었다고 한다. 미군들이 배밭벌을 발음하기 어려우니까 미국식으로 뺏벌, 빼벌이라고 부른 데서 마을 지명이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지금의 미군 부대 앞에 있던 예전 야구장에 쑥과에 속하는 ‘뺑대’가 많이 피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미군들이 뺑대라고 발음하지 못해서 ‘뺑대’가 ‘뺏벌’이 되었다는 것이다. 뺏벌 주민들은 뺑대를 빗자루 모양으로 묶어 정월 대보름날 보름달을 보면서 달님 달님 하면서 불을 붙이고 소원을 빌었다. 뺑대는 들깨 알갱이 같이 열매에 기름기가 많아서 바싹바싹 잘 탔다고 한다. 뺑대와 과나련된 지명으로는 의정부시 이외에 평안남도 온천군 송현리 뺑대고개, 평안남도 평안군 송림리 뺑재골, 평안남도 대동군 연곡리 뺑재, 평양시 강남국 신정리 뺑재 등이 있다. 북한 지역에는 뺑대와 관련된 지명이 여러 곳에 보이는데, 남한에서는 이정부시 외에는 찾을 수가 없다. 셋째는 한 번 들어오면 발을 뺄 수 없는 뻘과 같은 곳이기에 뺏벌로 불렀다고 한다. 이것은 기지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는 임진왜란 당시 이시언(李時言)이 이끈 우관 전투 때 백병전을 하던 곳으로 변음되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의정부 땅이름 이야기 고산동 56P(의정부문화원 2021년 2월)

어떠세요? 세 번째 이야기로 소개된 뺏벌에 얽힌 우리 누이들의 이야기가 마음속으로 전해지시나요?

얼마나 지긋지긋한 삶이었으면 갯벌의 뻘과 같다는 표현을 썼을까요? 

빠져나오려고 용을 쓰면 쓸수록 자꾸만 밑으로 밑으로 침전되는 삶. 얼마나 진절 넌덜이가 났으면 저런 표현을 썼을까요?

보건부의 발표에 의하면 1959부터 1980년 까지 매춘시장을 경유한 한국여성은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늪 같은 삶이 기다리는 기지촌에, 한 번 빠지면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의 공간인 ‘양색시촌’에 왜 그렇게 많은 누이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일까?

내 어린 시절 ‘양공주’라 불렸던 누이들은 딱 두 종류. 집안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또는 강제로 납치당해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부분 무학이었고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었으며 미성년자들도 더러 있었죠.

이 두 부류의 공통점은 ‘스스로 들어오지 않았다.’데 있습니다. 자발성(自發性) 제로 사건. 

‘양공주’, ‘양색시’ 누나들을 대한민국 정부가 겉으로 부르는 다른 이름은 ‘산업역군’ 또는 ‘민간외교관’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애국자’라고까지 불러댔죠. 1964년 외화수입 1억 달러 중 미군 전용 홀에서 벌어들인 돈은 97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하니, ‘원자재 없이 외화를 벌어들이는 산업전사’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으니 당연히 ‘애국자’이고 ‘민간외교관’이라 칭할만합니다. 

1962년 미군이 성관계로 지불하는 금액은 숏 타임 2달러, 롱 타임 5달러. 2만 명 이상의 위안부가 6만 5,000명의 미군에게 성적 위안을 제공하고 벌어들인 돈 970만 달러. 그 970만 달러와 맞교환한 이름 ‘민간외교관’

전장의 병사들이 섹스를 즐길 수 있되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 손실을 막기 위해 포주제가 허용되었고, 보건소에 의해 매주 강제 성병 검진을 실시하여 정부가 달러를 벌어들이는 시스템.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국가 포주제.’ 

의정부는 ‘국가 포주제’가 적극 실시되는 도시였고, 대한민국은 의정부와 같은 기지촌들을 양성하여 ‘국가 포주제’로 달러를 벌어들이는 나라였습니다. 

누이들을 돈으로 여기고 감시하는 포주들은 빚으로, 마약으로, 폭력으로 누이들을 묶어놓았고, 정부는 보건소를 앞세워 정기검진이라는 성병검사로 누이들을 꽁꽁 묶어놓았죠.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돈벌이를 했다면, 의정부 기지촌에서 일어나는 성거래는 부도덕한 여성과 미군 병사 간의 사적인 거래로 봐야할까요? 한미 양국 간의 긴밀한 협력적 산물이라고 봐야 할까요?

한미 양국 간의 긴밀한 협력적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시각이 바로 설 때 비로소 우리 누이들의 행위는 ‘산업역군’이자 ‘민간외교관’이자 ‘애국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양색시와 미군병사 간의 사적 거래. 실제로는 단 한번도 ‘산업역군’이자 ‘민간외교관’이자 ‘애국자’로 취급된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숨겨놓았던 누나들의 진짜 이름 ‘미군위안부.’ 

기지촌 정화운동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와 놀랍도록 닮아있었다.‘깨끗한 성’을 보급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매주 강제로 성병 검진을 하였다.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오면 견디기 고통스러운 페니실린 주사를 맞고 3.4일간 ‘몽키하우스’라고 불린 보건소에 갇혀 있어야 했다. 의정부 기지촌 성매매에 종사했던 여성은 ‘페니실린을 맞으면 한쪽 다리가 찢겨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고 거의 걸을 수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검사결과가 어떻게든 음성으로 나오길 바라면서 약국에서 항생제 주사약을 구입하여 스스로 주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페니실린 과다투여로 쇼크사하는 여성들이 속출했지만, 정작 그 누구도 이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출처: https://hotline25.tistory.com/395 [한국여성의 전화: 티스토리]

[여성과 전쟁, 반복되는 역사②] 애국주의와 기지촌, kwhotline, 2016. 8. 29.

다음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정부가 어떤 시각으로 우리 누이들을 보았는지를 명확하게 정리해주는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즉, ‘양공주’로 불리기도 하고, ‘민간 외교관’으로 불리기도 하고, ‘미군위안부’로 불리기도 했던 우리 누이들은 극동지역 한국에 미군배치를 원했던 미국 정부와 달러벌이가 필요했던 한국정부가 만나 만들어낸 섹스동맹의 희생물이자 국가 포주제의 희생양이었던 겁니다.

돈은 대한민국이 챙기고 희생은 각자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무지막지한 횡포가 한미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의정부를 비롯한 전국 기지촌에서 펼쳐졌다는 놀라운 사실.

'60년대 당시, 기지촌관련 산업은 대한민국 전체 GNP의 25%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중 절반은 성산업과 관련된 것이었다(캐더린 문(Moon), 1997: 44). 미군 전용 홀은 

1964년, 9백 7십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는데 (한국관광 50년 비사), 이는 당시 한국이 

벌어들이는 총 외화 1억 달러의 10% 수준이었다(한국일보, 2004년 2월 10일). 일인당 

국민소득이 104 달러이던 시절(1964년 기준), 한 달에 120 달러의 임금을 받는 미군 사병의 위력은 그들의 ‘부재’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1968년을 

기준으로 볼 때 외국군인을 상대하는 여성들이 연간 1억 7천만 달러(483억 원)를 벌어들였다는 기록도 있다(정태기, 1970; 김희식, 2006; 23 재인용).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1970년, 당시 김학렬 경제기획원장은 미군철수 이후 대책에 관한 국회질의에 대한 답변에서, 미군 주둔으로 얻는 외화는 건설, 용역, 물품으로 구성되는 직접군납 1억 달러와 불법 PX경제 등을 제외하고도 연간 1억6천만 달러에 달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신동아, 1970년 9월호: 130). 1969년 당시 국가 총 수출액이 6억 2,200만 달러였다(통계청, 1995)'

 한국의 성매매 체제: 공창, 위안부, 그리고 양공주 만들기 

 - 이나영(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이글을 쓰는 나는 이 시점에서 왜? 일본군 위안부 사건과 희생자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이 떠오르는 것일까요? 

이 글을 쓰는 나는 이 시점에서 왜?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했으나 ‘환향(還鄕)년’이라 손가락질 당하고 젊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의정부 금오동 출신 의순공주(義順公主) 이애숙(李愛淑)의 슬픈 삶이 떠올라 달기똥 같은 굵은 눈물을 뚝뚝 떨구어야 하는 것일까요? 왜? 왜? 이 시점에서...

그건 바로 기지촌 의정부에서 일어난 ‘양공주’ 사건이 제2의 의순공주(義順公主)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저자 신동명 교육학박사

현) 세한대학교 사회복지상담학과 교수

현) 전국지명밟기운동본부 대표

저서: 역사소년 신새날, 십대토론, 행복한 수다가 치매를 예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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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8-04 16:4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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