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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서노의 무덤을 찾아서-2

 

‘온조국(溫祚國)‘을 온조와 함께 세운 여제 소서노는 ’오호입성(五虎入城)사건’으로 의정부 회룡분지 범골에서 사망했다는 내용을 ‘이야기 시리즈-8번’에서 신동명 박사는 심도 있게 다룬 적이 있습니다.

기억하시죠? 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기억을 더듬어 보면 기억이 코딱지만큼은 나실 텐데요? 정말 아무 것도 생각이 안 나신다고요! 그럴 리가? 신박신박 신동명 박사의 글이 여러분들에게 사랑받지 못 하고 있는 거군요. 정녕 그런 건가요? 흑.

아무튼 어찌 되었건 저찌 되었건 간에 잃어버린 온조대왕 13년의 역사를 추적하는 신동명 박사의 노력은 계속됩니다.

[十三年 春二月 王都老化爲男 五虎入城 王母薨 年六十一歲]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 봄 (음력) 2월, 경성에서 늙은 할미가 남자로 둔갑했고,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다. 나이 61세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하. 소서노는 나이 61세에 사망했고, 그 때가 기원전 6년 온조왕 13년 되는 해 2월이었군요. 그렇다면 최고의 권력자이자 왕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어딘가에 능을 조성해야 맞는 거 아닌가요?

[夏五月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疆境 少有寧日 況今妖祥屢見 國母棄養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土壤膏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計 秋七月 就漢山下 立柵 移慰禮城民戶]

여름 5월 왕은 신하더러 이르기를 "국가가 동으로 나라(樂浪)가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강토를 침략하여 편할 날이 없는데 하물며 궂은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마저 돌아가시니 형세가 아무래도 편안할 것 같지 않다. 반드시 도읍을 옮겨야겠다. 어제 내가 한강의 남쪽을 순시한 바 토지가 매우 기름지다. 거기에 도읍하여 장구의 계책을 도모하는 것이 옳다"라고 하였다. 가을 7월 한산 아래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기었다.

 

十七年春(십칠년춘) : 17년 봄, 

樂浪來侵(락랑래침) : 낙랑이 침입하여 

焚慰禮城(분위례성) : 위례성을 불태웠다. 

夏四月(하사월) : 여름 4월, 

立廟以祀國母(립묘이사국모) : 사당을 세우고 왕의 어머니에게 제사지냈다.

三國史記 第 二十三卷(삼국사기 제 23권) 百濟本紀 第 一(백제본기 제 01)

아무리 소서노의 죽음이 온조왕과의 정치적 갈등 때문이라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무덤을 조성하지 않았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재밌는 건, 분명히 하남에 내려가서 여제 소서노의 사당을 세웠다는 기록은 있는데 소서노 ‘능의 위치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는 거.

 

그래서 여러 가지 자료를 토대로 합리적 의심의 검색엔진을 심하게 돌려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몇 톨 안남은 대머리 박사 신동명의 머리털이 몇 개 빠지는 아픔이 동반되었다는 사실은 안 비밀...ㅠㅠ. 

그렇게 해서 도출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온조왕 13년 (음력) 2월에 여제 소서노가 훙거(薨去)했고, 그 해 5월에 매우 급하게 하남으로 내려 간 후 4년 뒤 하남위례성에서 사당을 지었다면, 소서노의 능은 온조왕 13년 3~4월 즉 2개월 이내에 급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2. 그렇다면 먼 곳이 아닌 곳. 사건이 터진 의정부 범골 또는 초기 하북위례성의 영역 안의 어디엔가 장사를 지내고, 무덤을 조성했을 것이다.

3. 무덤을 조성했으나 2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때문에라도 무덤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단 제사는 웅장하게 지냈을 것이니 그 흔적은 지명에 남아 있을 확률이 높다.

4. 대를 이어 관리를 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산제사나 축문, 토착집안의 족보 또는 내력, 전설 등에 흔적이 남아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고민을 하던 중 의정부지명밟기운동본부 회원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2022년 9월 24일 토요일 오후4시(참가자: 김수원(72세), 신동명(60), 정창현(57))에 ‘대모산성’ 정상을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서 미증유(未曾有)의 무덤 하나를 발견하게 되죠. 세상에 딱 하나 밖에 없는 모양을 하고 있는 돌무덤을 마침내 발견하고야 만 겁니다.

전체가 돌로 만들어진 이상한 모양의 무덤 하나. 

무덤 정중앙에는 ‘묘(墓)’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봉분과 상석, 용미와 사성까지 전체가 돌로 이루어진 여직이 단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무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의정부지명밟기운동본부 회원들은 스무 하루 동안 지독한 신열(神熱)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궁금증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집채 만한 파도가 되어 ‘소서노의 흔적’을 어서 나가 찾아보라 보이지 않는 손이 등을 떠밀어대니 마침내 2022년 10월 15일 토요일 오전 10시(참가자: 신동명(60), 정일삼(60), 정창현(57)). 추석이 지난, 그 주에 방문을 박차고 대모산성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맙니다. 

그리고 잡풀 가득한 무덤의 풀을 제거하면서 이 무덤이 ‘소서노의 능’일 확률에 대한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가감없이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죠.

부정적 측면

(정일삼 파)

①‘묘(墓)’라는 글씨가 너무나 선명하다는 것

②사성에 쌓인 돌들에 시멘트가 사용되었다는 것

③망주석의 역할을 하는 부분에 쓰인 글자들이 ‘소서노’ 또는 ‘왕’이라는 글자가 아니라는 거(매우 흐리고 추적하기 어렵긴 하지만)

④주변에 개인 사설 묘지라는 글자가 돌에 쓰였다는 것

긍정적 측면

(김수원 파)

①무덤의 모양이 돌무지 무덤 형태로 봐야 한다는 것

②상석이 무덤의 시작지점부터 끝나는 부분까지 연결될 정도로 대규모라는 것(대규모의 제사를 진행했다는 흔적)

③오른쪽 사성의 받침돌 중 하나로 연결된 큰 돌이 금이 갈 정도라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흘러야 가능하다는 것

④무덤의 방향이 호원동 범골을 정방향하고 있고, 동북쪽으로는 오녀산성을 닮은 불곡산의 능선이 펼쳐져 있다는 것 

사물을 보는 시각은 서로 다 다를 수밖에 없다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저는 김수원 파의 입장이라는 것을 먼저 밝히면서 왜 이 무덤이 ‘소서노의 능’인지를 피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이 시멘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때가 언제일까요? 한 100년 조금 넘는다지요. 즉 일제 통치 때부터 사용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명 하나를 건드려 볼게요. 앞의 글에서 신동명 박사가 ‘고능리(古陵里)’라는 이름이 언제 등장한다고 했죠? 1895년 일본군사지도에 처음 등장한다고 말씀드렸죠!

이 부분에서 이미 그들은 대모산성의 이 ‘돌무덤’이 ‘고대의 역사를 품고 있는 능’이라는 것을 알고 조사를 끝 맞친 후 ‘고능리(古陵里)’라는 지명으로 지도에 기록해 놓았다고 봐야 타당한 추리가 될 것입니다.

의정부 호원동 범골(온조국 하북위례성)과 직선으로 이어져있는 대모산성의 돌무덤

대모산 무덤 동북 방향으로 훤히 보이는 불곡산의 능선. 고구려 오녀산성을 닮았다. 

고구려와 같은 강력한 국가를 꿈꿨던 소서노와 온조의 염원이 느껴진다.

고구려 최초의 수도 ‘오녀산성’.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번시시(本溪市) 환런현(桓仁縣)의 오녀산(해발 806m)에 있는 고구려 왕성 유적

이 말을 조금 더 발전시킨다면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일본넘들이 ‘고능리(古陵里)’에 대한 모든 조사를 끝내고, ‘오래 된 능이 있는 산성’인 대모산에 올라가 무너져 가는 돌무덤을 시멘트 작업을 허여 지탱시켰다라는 추리가 가능해지는 대목입니다. 시멘트를 발라 지탱시킨 경우는 이 돌무덤 뿐 아니라 경주의 다보탑이나 석가탑도 똑같은 사레를 보입니다. 

돌무덤의 양식이 독특하니까 돌무덤의 양식을 가지고 접근해볼까요? 그랬을 경우에도 이 무덤은 ‘소서노의 무덤’일 가능성을 더욱 확장시킵니다. 

돌무지무덤이니까요. 돌무지무덤인데 왜 그런 추측이 가능한 거냐고요?

전곡 연천 학곡리 적석총.

돌무지 무덤의 초기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유물로 고구려 초기 돌무지 무덤과 유사하다.

중국 상고성자 고분군의 돌무지무덤. 

중국 집안 지역에서 1~3세기에 유행하던 고구려 돌무지무덤과 유사한 형태

대모산성의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돌무지 무덤

돌무지무덤은 고구려 무덤의 특징이면서 초기 백제 무덤의 대표적인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초기 백제 무덤의 형태인 돌무지 무덤이 양주 대모산성 정상부에 자리한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자 직선 거리인 의정부 호원동 회룡분지에 ‘소서노 사망 사건’이 일어난다? 

어떠셔요? 이 정도면 대모산 정상에 있는 돌무지 무덤이 ‘소서노의 능’일 가능성이 괴장히 높아지고 있지 않나요?

그러나 제가 이 무덤을 ‘소서노의 능’으로 추정하는 데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고구려 오녀산성(五女山城)의 모양과 꼭 닮은 불곡산 능선이 활짝 펼쳐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죠.

왜냐하면 이 대모산 밑으로 어둔리를 끼고 까치고개 넘으면 바로 의정부 녹양동 ‘버들개’가 나오는데 이 ‘버들개’라는 지명이 바로 여제 소서노가 ‘고구려처럼 강대한 나라’를 꿈꾸며 자신을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 버들꽃 부인)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며 소서노가 직접 붙인 지명이기 때문입니다.

온조대왕은 소서노와 권력 문제로 많이 부딪혔지만 ‘소서노가 가진 꿈’이 무엇인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고, 어머니와의 약속 꼭 지키겠다는 다짐을 담아 무덤을 조성했을 겁니다. 그러한 의지는 대모산에 소서노의 무덤을 조성하기에 이르고 양주 방성리 뿐이 아니라 의정부 녹양동에도 전달되어 아직도 지명으로 남아 전해오게 되는 거죠. 그 강력한 증거가 ‘버들개’ 옆 마을 녹양동 ‘능논골’인 겁니다. 

 

 

 

신동명 교육학박사

 

현) 세한대학교 사회복지상담학과 교수

현) 전국지명밟기운동본부 대표

저서: 역사소년 신새날, 십대토론, 행복한 수다가 치매를 예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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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1-18 13:5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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