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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를 다시 품다-9-중랑천은 ᄒᆞᆫ강(韓江)이고 의정부는 온조국의 하북위례성이다.
  • 기사등록 2023-04-19 14: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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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를 다시 품다-9-중랑천은 ᄒᆞᆫ강(韓江)이고 의정부는 온조국의 하북위례성이다.

 

 

양주 남쪽 견주에 있는 마들(현재 도봉, 노원)의 땅이름은 ‘해등촌’이었습니다. ‘바다와 동등한 크기의 강가에 있는 마을’ 해등촌(海等村).

이 ‘해등촌’을 태종 실록에서는 다르게 부릅니다. ‘해촌(海村)의 들’

辛酉/上出次楊州南郊, 候太上之還也。 太上次楊州客舍, 上謁見, 進酒極歡。 暮, 還南郊帳殿。 翼日, 太上王曉發, 次于海村之郊, 上隨至進酒, 退次于川邊行殿

임금이 양주(楊州) 남교(南郊)에 나가 머물렀으니, 태상왕(太上王)의 환가(還駕)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태상왕이 양주 객사(客舍)에 머무르니, 임금이 알현(謁見)하고 술을 올려 매우 즐기었다. 저물어서 남교의 장전(帳殿)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새벽에 태상왕이 출발하여 해촌(海村)의 들에 머무르니, 임금이 따라와서 술을 올리고, 냇가의 행전(行殿)으로 물러와서 머물었다.

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1406년 명 영락(永樂) 4년) 11월 5일(신유) 1번 째 기사

이야기를 정리해 본 즉슨 태상왕 이성계가 천렵을 즐기던 조선 초기 시대에 의정부 중랑천은 ‘바다만큼 넓었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아~하. 지금의 중랑천이 그때는 바다만큼 넓었군요. 사실 제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중랑천의 싸이즈는 엄청났습니다. 작은 개울이나, 새끼강, 사잇강 정도의 크기를 훌쩍 넘은 광활한 스케일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사실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아서 그렇지 중랑천이 엄청나게 컸을 것이라는 걸 추측할 수 있는 흔적은 아직도 지명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창동과 상계 일대를 지날 때의 중랑천의 이름이 한내, 한천인 걸보면 말입니다. 한내, 한천은 큰 내, 큰 강이라는 뜻이니까요.

신박신박 신동명박사가 이 얘기를 왜 꺼내는 것일까?

그건 바로 의정부를 지나는 중랑천이 ᄒᆞᆫ강(韓江)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뭘 할 거냐? 의정부가 온조국의 ‘하북위례성’이다라는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 주장은 중랑천이 ᄒᆞᆫ강(韓江)이라는 것이 증명될 때 fact 즉, 객관적 사실이 되죠.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강의 남쪽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와 같은 지세의 험준함과 이점은 얻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 왕조

하북위례성의 위치 논쟁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北帶漢水(북대한수), 東據高岳(동거고악), 南望沃澤(남망옥택), 西阻大海(서조대해)’ 바로 이 네 가지. 

어느 지역이 이 네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됩니다.

『북쪽은 한수(한강)가 띠처럼 두른다. 동쪽은 높은 산을 의지하고 있다. 남쪽은 기름진 연못을 바라본다. 서쪽은 큰 바다가 막고 있어서, 其天險地利(기천험지리) 하늘이 내린 험한 지형이자 難得之勢(난득지세) 얻기 어려운 지형이어서 作都於斯(작도어사) 도읍으로 정해야 할 곳.』

이 하북위례성을 찾아내고자 다산 정약용 같은 시대의 석학들은 발 벗고 나섰지만 끝내 그곳을 찾아내지는 못 하였죠. 

왜? 시대의 석학들은 찾아내지를 못 했을까요?

그건 ‘北帶漢水(북대한수), 東據高岳(동거고악), 南望沃澤(남망옥택), 西阻大海(서조대해)’ 4가지 중 ‘北帶漢水(북대한수)’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앗? 그렇다면 서울 풍납토성 바로 위에 한강이 있으니 ‘北帶漢水(북대한수)’ 아닌가? 

서울 풍납토성이 하북위례성이 아니라는 증거를 제시해보겠습니다.

① 13년 밖에 거주하지 않았던 초기 도읍지로서는 도시 규모와 시설의 완성도가 너무 높다.

② 하북에서 하남으로 매우 정상적으로 천도하였는데, 그렇게 많은 유물을 남겨놓고 떠난다?

③ 물난리가 나기 쉽고 적의 침입이 용이한 강기슭에 왕이 거처하는 도읍지를 세운다? 

그래서 서울 풍납토성은 하남위례성일 수는 있을지언정 하북위례성은 아닌 겁니다.

앗? 그렇다면 파주 전곡 육계토성도 ‘北帶漢水(북대한수)’인데? 

물론 임진강이 거대한 강이니까 한강으로 본다면 이러한 주장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주 전곡 육계토성 또한 하북위례성은 아닙니다.

제가 현장에 가서 찍은 사진을 한 장 공개하겠습니다.

최근 육계토성으로 발굴되고 있는 터, 바로 앞 임진강가의 모습을 담은 사진입니다. 

제가 뭘 보여드리고 싶은 거냐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넘어오는 낮은 물길입니다. 직접 가보시면 북쪽에서 넘어오기 가장 쉬운 즉 가장 낮은 곳의 물길에 육계토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바로 앞에 모래톱 보이시죠? 거기까지가 100m 정도라고 해야 할까요? 더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온조왕(溫祚王) 2년(B.C 17년) 봄 정월 왕은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말갈이 우리 북쪽 경계와 연접하여 그 사람들이 날래고 간사하니 마땅히 무기를 수선하고 군량을 저축하여 막고 지킬 계책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3월 왕은 족부(族父) 을음(乙音)이 지식과 담력이 있다 하여 우보(右補)의 직을 제수하고 병마를 위촉하였다. 

二年 春正月 王謂群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宜繕兵積穀 爲拒守之計” 三月 王以族父乙音 有智識膽力 拜爲右輔 委以兵馬之事.」

 

「온조왕(溫祚王) 3년(B.C 16년) 가을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범하므로 왕이 강한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공격하니 적은 크게 패하여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열에 하나 둘이었다. 

三年 秋 九月 靺鞨侵北境 王帥勁兵 急擊大敗之 賊生還者十一二」

그러면 그 길을 누가 사용했을까요? 임진강 북쪽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요? 바로 말갈족입니다. 

위의 사료를 보시면 온조왕이 말갈족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을지 짐작이 가는 사료 아닙니까?

그런데 공격해 들어오라고 가장 낮은 물길에, 밟고 지나가면 꽥 소리 한 번 못 지를 지척에 토성을 짓는다?

거기에 강가 바로 옆이라 물의 범람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볼 수 있는 곳에 도읍지를 정한다? 

싸움에 밀리면 후퇴하여 안전하게 군사력을 추스를 시간이나 있겠냐? 이 말입니다.

이제 남의 동네 이야기는 그만두고 의정부가 지금으로부터 2041년 전인 BCE 18년에 온조국의 도읍지 하북위례성이었다는 우리 동네에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요!

신동명 박사는 초두에 이 글을 집필하는 이유에 대하여 밝혔습니다.

의정부가 2041년 전 온조국의 도읍지 하북위례성이라는 것을 밝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랑천이 ᄒᆞᆫ강(韓江)이라 것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뭐 이 정도의 이야기였습니다.

신동명 박사는 중랑천이 ᄒᆞᆫ강(韓江)이라는 것을 증명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기에 이렇게 집착하는 것일까요?

그건 바로 의정부 중랑천이 ‘北帶漢水(북대한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앗? 정말!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중랑천이 ‘北帶漢水(북대한수)’라는 것이 증명이 되면, 주변에 별로 자랑할 거 없던 도시에서 기원전 18년 온조국의 도읍지 하북위례성으로 되살아나게 되는 겁니다.

마침내 이걸 해내는구나. 동명이가! 장하다. 동명이. 우헤헷.

2022년 가을 의정부지명밟기운동본부 김수원(현 72세) 고문으로부터 신동명박사는 한 장의 지도를 전달받습니다.

1916년에 측량하고 1918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만들어 발행한, 의정부 지역 1:5만 축적 지형도. 다시 말해서 일제가 의정부를 잘 수탈하기 위해서 제작된 정밀지도가 한 장 도착한 것입니다.

‘아니. 이런 놀라운 지도가!’

그 지도를 보는 순간, 심장이 벌렁벌렁 눈은 이티의 눈처럼 고무풍선 터져 나오듯 커졌죠.

‘중랑천’이라 쓰여 있어야 할 자리에 ‘한강’이라는 글씨가 똬악~.

엄맘마. 이런 기적 같은 일이. 하늘이시여 동명이의 노력을 불쌍히 여기사 이런 역사를 필부의 손을 빌려 밝히시고 백발의 면류관을 씌워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조선총독부에서 1916년에 만든 의정부 고장 1:5만 축적 지형도.

경원선 철도가 보이고 중랑천을 ‘한강’으로 표기하고 있다.

1916년에 측량 18년에 발행. 본디 지도에는 한자로 적혀있다.

 

지도 안에 경원선 철도가 가로지르고 지나가는 거 보이시죠. 그리고 빨간 동그라미 친 부분이 지금의 중랑천인데 거기에 중랑천 대신에 ‘한강’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거 보이시죠!

놀랍지 않으세요. 중랑천이 ᄒᆞᆫ강(韓江)이었다니! 이럴 수가?

그래서 ‘해등촌’, ‘해촌의 들’, ‘한내’, ‘한천’으로 불렸었던 것이구나.

그러면 여기서 논리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켜볼까요?

아래의 왼쪽 부분에 빨간 동그라미가 보이시죠? 그 위치에서 본다면 이 ᄒᆞᆫ강(韓江)은 북쪽입니까? 남쪽입니까? 북쪽이죠. 

아래의 왼쪽 부분에 빨간 동그라미 부분은 현재 호원동 동원예비군 훈련장 즉, 호원동 산 55-1에 해당하는 곳인데요. 이곳에서 ᄒᆞᆫ강(韓江)을 본다면 어떤 모습일 거 같으세요?

제가 그곳 산등성이에 올라가서 살펴보았더니, 긴 물줄기가 북쪽에서부터 남쪽으로 길게 띠처럼 이어져 있더라구요.

앗! 그러면 ‘北帶漢水(북대한수)’

그렇습니다. 빨간 동그라미 부분이 바로 기원전 18년 온조국이 선포되고 도읍지 ‘하북위례성’으로 결정된 자리죠. 

아. 이런 제기랄 일본정부가 제작한 이 한 장의 지도 때문에 잃어버린 온조국 13년의 역사를 되살릴 수 있게 되다니...

그러고 보니까 의정부 하북위례성 자리는 천혜의 요새 중의 요새네요.

강과 지척도 아니면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고, 바로 뒤의 산에 가파른 능선과 피신처로 사용할 거대한 동굴이 있고, 동으로는 빼어난 용모를 갖춘 수락산이 버티고 있고, 남으로는 신곡평야와 마들평야가 드넓게 펼쳐져 있으며 서쪽으로는 인천바다가 있으니

이곳이 말로 東據高岳(동거고악), 南望沃澤(남망옥택), 西阻大海(서조대해)라는 조건을 모두 갖춘 其天險地利(기천험지리) 하늘이 내린 요새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엉? 일본 놈들이 만든 지도를 어떻게 믿느냐고요?

원래 훔쳐가려는 놈이 우리 집에 뭐 있는지 더 잘 아는 거 모르슈?

수탈하려면 그 나라에 무엇이 있는지는 수탈하려는 놈들이 더 잘 아는 법.

한 번 물어봅시다. 의정부 오리골 옥재동굴에 푸른 옥이 나오는 건 아셨수? 모르셨잖아. 일본 놈들은 그런 거 까지 세세히 다 조사해서 하나도 안남기고 훔쳐간 놈들이오.

착취하려고 만든 지도가 왜? 당신에 눈에는 어설프게 보이슈? 

차라리 의정부가 하북위례성이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쌍태부르고 딴지 거는 중이라고 하는 게 더 설득력 있는 말이 될 게요. 아마도.

 

 

신동명 교육학박사

전) 세한대학교 휴먼서비스학과 교수

전) 영남사이버대학교 논술지도학과 교수

현) 전국지명밟기운동본부 전국총재

 

저서: 개입하지 않는 용기

 따라하면 끝나는 실전토론교과서

 십대토론

 행복한 수다가 치매를 예방한다.

 역사소년 신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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